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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부장의 타작마당
죽음에 대한 묵상 개인적으로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묵상했던 첫 기억은 여섯 살 때였다. 어린 나이에 무엇을 알았을까마는, 동네 놀이터 그네에 앉아서 “내가 이 세상에서 없어진다면 부모님은 얼마나 힘 드실까?”, “내가 없다고 세상이 변하기는 할까?” 등등의 다소 철학적인 생각을 했었다. 그 때 내게 죽음은 부재로 인한 이별의 고통과 더불어서 꽤나 허무주의적인 고민이었던 듯하다. 이후 죽음에 대해 다시 깊이 고민하게 된 것은, 고등학교 시절 교회에서 구원의 확신에 관한 신앙적 갈증이 생기고 나서부터였다. 시시때때로 구원의 확신을 점검하시던 안수집사님 덕에 꽤 진지하게 죽음 이후의 세계를 생각했었다. 다만 그 때는 죽음이 참 두렵기만 했고, 아직 죽으면 안 된다는 저항감만 강하게 들었다. 왜냐하면 아직 구원..
파편처럼 떠돌던 성경의 각 내용들이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되어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리는 경험은 언제나 큰 감동을 준다. 그것은 고고학적 탐사와 발견의 결과로 인해 ‘성서’의 내용이 역사(歷史)적 사건으로써 사실이라고 증명될 때 느끼는 기쁨과도 차원이 다르다. 바야흐로 ‘서(書)’가 ‘경(經)’으로 상승될 때의 그 감동은, 신실하신 하나님이 진행하는 역사(役事)로써의 ‘성경’이 우리 영혼에 침투해오고 있다는 진실을 마주한 인간의 근원적 희열과 다름없다. 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전, 그레고리 빌의 『성전신학』을 읽었을 때 위와 같은 감동이 있었다. 성경의 구속사를, 에덴부터 새 예루살렘까지 ‘성전’이라는 하나의 모티브로 연결할 수 있다는 것에서 감탄을 그칠 수 없었다. 그러나 당시 신학적 지식이 미비하였고..
들어가는 말 누군가가 나를 다른 사람에게 소개하면서 한두 단어로 특정할 때, 그것이 나의 참된 모습인가 고개를 갸우뚱하게 될 때가 있다. 예를 들면, “따뜻한 마음을 가진 캠퍼스 사역자” 이런 식의 표현이 얼마나 나에 대해 많은 정보를 제공할 수 있을까 의심이 되는 것이다. 사람에 대해 따뜻한 면이 있지만 어떤 사안이나 사조에 관해 냉철한 통찰력으로 비판할 때가 있고, 캠퍼스 사역자는 내가 맡은 많은 역할 중에 하나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본서의 제목, 『긍휼의 목자 예수』를 접할 때의 처음 느낌은 이와 비슷했다. 예수님에 대해 설명하면서, “긍휼”과 “목자”로 한정하는 것이 과연 적절할까? 더군다나 마태복음과 관련해서 약간은 생소한 그 두 단어가 얼마나 우리 예수님을 포괄적으로 설명해줄 수 있을..
제임스 에머리 화이트의 [신은 존재하는가?](IVP) 0. 불가지론에서 시작하기 : 불가지론자들은 신 자체를 부정한다기보다는 신의 인지 가능성을 거부한다. "신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어." - 불가지론자들이 갖고 있는 그 모름의 이유는 신존재 증명을 과학적 방법론(관찰/반복/실험/증명)으로 시도하기 때문임. - '신을 믿는 것이 믿지 않는 것보다 더 합리적이라고 증명할 증거가 충분한가'를 고민하는 것이 더 나은 접근법 1. 존재론적 논증 - 켄터베리의 안셀무스 : 신은 상상 가능한 모든 존재 중에서 가장 위대하다. 그런데 존재하지 않는 것은 상상 가능한 모든 존재 중에서 가장 위대할 수 없다. 왜냐하면 존재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보다 더 위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은 정의상 존재할 수밖에 없다. -..
유진 피터슨의 “주와 함께 달려가리이다”는 예레미야서를 통해 본 예레미야의 ‘신앙적인 삶’과 ‘삶을 담은 신앙’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태초에 미리 아시고 선택하셔서 세워 보내신 선지자로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과 적대적이거나 피상적인 관계만 맺고 있는 이스라엘의 혼란스러운 현실에서 살고 사역했다. 하나님은 이러한 세상 속에서 예레미야에게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에서 우러나오는 최상의 삶을 살고, 또 다른 사람들도 그와 같은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전하도록 초청하셨다. 예레미야는 그의 전 생애를 통해 하나님의 요청에 응답하였고,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삶이 곧 하나님 없이 사는 세상을 향한 당신의 메시지가 되도록 하셨다. 사실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요청하신 구별된 삶은 예레미..
모든 죠이어를 위한 부르심 학부생 죠이어들과 ‘직업과 선교’라는 주제로 대화할 때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는 “간사님, 저는 그냥 ‘취업’해서 ‘보내는 선교사’로 살래요.”이다. 보내는 선교사가 재정 후원 이외에 어떤 역할을 감당하는지, 보내는 선교사로서 살겠다며 선택한 그 직업이 정말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에 근거한 것인지는 별로 고민하지 않는다. 단지 막연하게 갖는 선교에 대한 부담감이 그와 같은 대답을 이끌어낸 것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실제로 그들은 졸업 후에 자신이 선택한 직업에 충실하게 살아간다. 하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선교에 대한 부담감을 재정 후원으로만 상쇄하고 마는 것이, 그들이 학부 때 선교에 대해 받았던 도전의 크기에 비해서는 다소 아쉽게 느껴지기만 한다. 본서는 직업과 관련한 선교의 타입..
운전을 배워가면서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어려운 과정은 면허증을 취득하는 최초의 과정일 것이다. 새로운 기술을 배우는 과정이기 때문에 극도로 긴장하고 강사의 말 한마디 하나하나와 세세한 운전습관조차도 배우려고 애쓰기 마련이다. 꽤나 긴장되는 그 배움의 시간을 견디는 동력은 아마도 베스트 드라이버가 되어 있어서 도로를 활주하는 자신의 모습을 꿈꾸는데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일단 운전면허를 취득하고 어느 정도 운전에 익숙해질 때쯤이면 처음 운전을 배울 때의 조심성이나 적절한 수준의 긴장, 베스트 드라이버가 되기를 바라는 소망 정도가 확연히 사라지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왜 그럴까? 그것은 자신이 애초에 운전을 배우고자 했던 동기부터 살펴보는 것이 빠르다. 운전의 목적이 자신을 목적지까지 단순히 이동시키는 것에 있..
사실 개인적으로 간사로 지원하게 된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설교자로서의 도전’이었다. 감사하게도 학부시절에 탁월하신 간사님들에게 좋은 설교를 듣고 마음껏 영적 씨름을 할 수 있었고, 그 시간들이 당시에는 힘들었지만 결국에는 나를 영적으로 살찌워갔던 기억이 강하게 남아있다. 나 역시도 그런 설교자가 되어서 후배들에게 말씀으로 도전하고 싶었고, 실제적으로 말씀으로 한 사람이 변해가는 과정을 옆에서 보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다. 그렇지만 실제 간사가 되어서 현장에서 설교를 하며 지내온 지난 9개월 정도의 시간동안 내가 느낀 것은 철저한 무력감이다. 내 자신이 설교자로서 준비가 잘 되어 있지 않다는 반성과 함께 실제 캠퍼스 간사 사역은 설교만 할 수 있는 여건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현실적인 어려움도 깊이 느낄..
“다윗: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 이 책은 3학년 여름 수양회를 두고 새롭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자 찾아 읽었던 책이었다. 그 때 이 내용들을 얼마나 이해하면서 읽었는지 모르겠지만, 8년 후에 다시 읽으니 느낌이 그 때와는 조금은 다르게 다가온다. 두 가지 정도로 생각해보며 읽게 되었다. 첫 번째는 유진 피터슨이라는 저자에게 집중하여 보게 된 점이다, 사실 개인적으로 설교를 들을 때 가장 마음에 와닿는 것은 명확하고 논리적인 류의 설교이다. 삼대지 설교까지는 아니라 할지라도 설교를 들은 후에 무언가 분명한 명제가 기억에 남아있는 설교가 좋았다. 하지만 최근에 포스트모더니즘의 청중을 대상으로 한 이야기식 설교에 대한 도전을 많이 받으면서, 그리고 실제로 그런 류의 설교를 들으면서 생각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
언젠가 다이어리에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자기가 바라보고 있는 시각이 가장 균형 잡혀 있다 생각하지만.. 일단 자신이 얼마나 경향성이 심한 사람인지 깨닫는다면, 우리네 관계들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나는 최대한 상대방을 있는 모습 그대로 이해한다고 생각하지만, 이미 내가 갖고 있는 선입견과 가치관 등으로 인해서 상대방을 왜곡해서 인식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고 답답한 마음에 써내려갔던 일기였다. 그런데 이 짧은 글 속에도 세계관의 함의가 들어가 있다. 생각해보면 비단 인간관계 뿐 아니라,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그런 식으로 인식한다. 나와 타자, 혹은 대상이 직접적으로 대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어떤 인식의 틀이 존재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 틀을 “세계관”이라고 부른다. 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