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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우리는 항상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

白부장 2020. 10. 6. 21:33

 

죽음에 대한 묵상

 개인적으로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묵상했던 첫 기억은 여섯 살 때였다. 어린 나이에 무엇을 알았을까마는, 동네 놀이터 그네에 앉아서 “내가 이 세상에서 없어진다면 부모님은 얼마나 힘 드실까?”, “내가 없다고 세상이 변하기는 할까?” 등등의 다소 철학적인 생각을 했었다. 그 때 내게 죽음은 부재로 인한 이별의 고통과 더불어서 꽤나 허무주의적인 고민이었던 듯하다.

 이후 죽음에 대해 다시 깊이 고민하게 된 것은, 고등학교 시절 교회에서 구원의 확신에 관한 신앙적 갈증이 생기고 나서부터였다. 시시때때로 구원의 확신을 점검하시던 안수집사님 덕에 꽤 진지하게 죽음 이후의 세계를 생각했었다. 다만 그 때는 죽음이 참 두렵기만 했고, 아직 죽으면 안 된다는 저항감만 강하게 들었다. 왜냐하면 아직 구원의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죽으면 천국에 못 가니까 죽음은 피해야하는 것이고, 내게서 최대한 멀리 있길 바라는 공포의 개념이었다.

 가장 최근에 죽음에 대해 실제적으로 생각했던 것은 교회 장로님 장례식에서였다. 아버지와 비슷한 연세의 장로님께서 암 투병 중에 돌아가셨는데, 10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경험이 데자뷰마냥 자꾸 떠올라 괴로웠다. 그래도 불편한 정서와는 상관없이 죽음에 대한 이해는 비교적 편안했는데, 이전과 달리 비로소 천국에 대한 소망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육체적 이별에 대한 정서적 상실감은 어쩔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극상의 하나님 나라에서 다시 만날-영원한 영적 연대의-사이라는 것에 기쁨이 있었다.

 차제에 개인적인 삶을 돌아보니 죽음에 대한 생각들이 인생의 타임라인 사이사이 멀지 않은 곳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인생이라는 죽어감 속에서 영적인 자라감이 있었음을 알게 됐다. 이런 것이 은혜이지 않을까? 특별히 본 주제에 대해 따로 공부한 것도 아닌데 주께서 마음과 생각에 필요한 성숙으로 채워주셨으니 말이다. 

 

가까이에 있는 죽음

 우리 개혁파 선조들은 과연 “죽음과 죽어감”을 어떻게 대했을까? 개인적인 감사와는 별개로 성도들에게 올바른 안내를 하기 위해서 『우리는 항상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를-보고서 작성의 이유 때문이었지만-독서하게 된 것은 축복이었다. 본서는 칼빈과 오웬과 벡스터가 죽음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드러냈는지를 추적하고 있다. 독서를 통해 발견한 공통점은 이들 모두가 죽음을 인간사에 드리워진 절망적인 핵심주제로 머뭇거리며 다루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일상적이며 가까이에 있는 것으로 죽음을 대했다는 인상이 강렬하게 남는다. 다른 인간적인 종교들을 생각해보면, 죽음과 죽어감은 그들이 반드시 다뤄야 할 핵심적인 주제이지 않은가? 아니 종교의 생성원인이라 말하는 것이 솔직한 입장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복음은 죽음에 대해 하나님의 섭리 안(칼빈)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궁극적인 해방을 맛보게 하는 통로(오웬)이자,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한 완성된 축복(벡스터)으로 가르친다. 정말이지 오직 우리 복음만이 죽음과 죽어감에 대한 궁극적인 해답을 가지고 있다는 확신이 든다. 실천적으로도 죽음을 회피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가까이에 있음을 인정하지만, 하나님의 도우심 안에서 통제할 수 있는 대상으로 여기는 영적이고 탁월한 지혜를 가졌다. 

 

교훈과 목양 사이의 긴장 수용하기

 본서에서 다룬 세 사람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바로 칼빈이다. 사실 그동안 칼빈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다는 미안한 감정이 먼저 들었을 정도였다. 꽤나 오랫동안 칼빈을 감정이 배제된 논리로 점철된 신학적 괴물로 여겼던 것 같다. 그래서 본서를 통해 큰 충격을 받았다. 특히 그가 이론과 실천에서 불균형을 보였고, 가르친바 된 교훈과 신자들에 대한 목양 사이에 일종의 긴장이 발견된다고 한 지점에서 충격을 넘어 위로를 받을 정도였다. 그가 분명 죽음에 대해 끊임없이 하나님의 섭리와 연결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선과 방불한 고통의 시간을 동료 목사의 죽음에서 경험했다는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질서와 논리정연의 신학 체계가 주는 깊은 안정감이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아파하면서 하나님을 찾는 그의 인간성에서 더욱 친밀하고 선명한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게 된다. 

 또한 자신의 독자와 아내의 죽음을 통해서, 타인의 죽음에 대한 고통을 깊이 공감을 하게 된 칼빈의 생애가 목회자로서 도전이 되었다. 오랜 암투병 속에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경험과 그 가운데 피폐해져 갔던 가정의 고통이, 앞으로 목회자로서 성도들을 대할 때 어떤 마음으로 대해야할 지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생긴다. 죽음에 대해 분명히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 절제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을 딱딱한 정보 전달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아파하며 눈물 속에서 하늘을 바라보게 하는 “불균형 속의 균형 잡음”으로 시도해볼 수 있을 듯하다.

 

언제나 하나님과의 교제 생각하기

 오웬은 성경주해를 통해 죽음을 다루면서, 육체적 죽음보다 영적 죽음의 심각성을 직면하게 하는 교훈을 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 죽음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이끄는 은혜이기에 불신자들처럼 죄와 죽음의 노예가 되지 않아야 하는 당위성도 깊이 묵상하게 한다. 한편, 벡스터는 죽음에 대한 관점 전환을 한층 더 강력하게 촉구한다. 죽어감의 애통 속에 있는 신자들에게 성경구절로 위로하며, 죽음을 하나님과 면대면의 축복을 경험하는 통로로 생각할 것을 외친다. 죽어가는 신자의 눈을 들어 십자가에 계신 구원의 주님을 바라보게 하는 벡스터는 현대적 관점으로 보면 다소 권위적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목회적으로 이런 강력한 전환이 필요한 사람들도 있지 않은가? 슬픔과 애통에 빠져 자신의 신앙마저 잃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는 어쩌면 이 같은 강렬한 도전이 필요할지 모른다. 

 

잘 살아가기

 본서는 항상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인간 실존에 천착하지만, 본인은 역설적으로 죽음이 아니라 잘 살아감이 무엇일까 묵상해보게 되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예정이라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가운데 살아간다면, 주께서 죽음이라는 통과의례 또한 넉넉히 거치도록 인도해줄 것이라는 신뢰가 생긴다. 

 물론 (한 번도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죽어감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 (영원한 상실을 가져오는) 죽음에 대한 애통과 무력함이 심중에 들어오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자유자는 그런 감정 자체를 탓하며 절망하는 악순환에 빠지지 않고, 감정은 감정대로 긍정하는 가운데 눈을 들어 우리를 어제도, 지금도, 내일도 안아주실 주님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과연 잘 살아가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죽음과 죽어감에 대한 절대성을 거부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참 삶은 하나님 외에 모든 것을 상대화하는 것이지 않겠는가? 죽음도, 죽어감도 예외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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