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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긍휼의 목자 예수

白부장 2020. 3. 23. 15:24

들어가는 말

 누군가가 나를 다른 사람에게 소개하면서 한두 단어로 특정할 때, 그것이 나의 참된 모습인가 고개를 갸우뚱하게 될 때가 있다. 예를 들면, “따뜻한 마음을 가진 캠퍼스 사역자” 이런 식의 표현이 얼마나 나에 대해 많은 정보를 제공할 수 있을까 의심이 되는 것이다. 사람에 대해 따뜻한 면이 있지만 어떤 사안이나 사조에 관해 냉철한 통찰력으로 비판할 때가 있고, 캠퍼스 사역자는 내가 맡은 많은 역할 중에 하나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본서의 제목, 『긍휼의 목자 예수』를 접할 때의 처음 느낌은 이와 비슷했다. 예수님에 대해 설명하면서, “긍휼”과 “목자”로 한정하는 것이 과연 적절할까? 더군다나 마태복음과 관련해서 약간은 생소한  그 두 단어가 얼마나 우리 예수님을 포괄적으로 설명해줄 수 있을까 회의감이 있었다.

 

신선한 관점

 그런데 본서의 서론 부분을 읽으면서 그런 갸우뚱함이 도리어 기대감으로 바뀌는 것을 보게 된다. 특히 구조적인 면에서 모세오경과의 연관성을 바탕으로 둔 5개 강화와 그 사이를 채우는 내러티브들의 교차라는 전통적인 관점을 넘어서, 저자 특유의 ‘종말의 두 목자’의 예언에 따른 (신선한) 구조를 취한다. 그에 따라 독자들이 마태복음을 유기적인 일련의 논리적 흐름을 가진 ‘한 권’의 책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또한 마태복음이 말하는 예수님을 두 목자의 구조를 바탕으로 일관적으로 설명해내는 것도 신선하다. 크레이그 L. 블롬버그는 그의 『예수와 복음서』에서 마태복음이 말하는 예수님에 대해 ‘선생’, ‘다윗의 후손, 왕, 왕 같은 메시아’, ‘높임 받으신 하나님의 아들’, ‘성육신 하신 지혜’, ‘주님’ 정도로 설명한다. 그런데 저자의 다윗의 아들이신 종말의 다윗 목자라는 관점은 이 모든 호칭을 포괄한다. 책의 제목에서 접한 ‘목자’는 고정관념으로 갖고 있던 목가적인 정취의 이미지라 예수님에 대해 한 부분만 취사선택한 결과이지 않을까 지레 걱정했는데, 성경이 말하는 목자의 의미를 저자의 설명에 따라 공부하다 보니 기우였다는 것을 알게 됐다. 오히려 그동안 일종의 논리적 공백이었던 예수님의 정체성과 그의 치유사역이 갖는 상관관계,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선교, 마태복음과 구약의 연관성 등에 대해 통찰력을 얻을 수 있는 탁월한 관점이었다. 

 

본서의 강점

 본서는 저자가 주장한대로 “종말의 두 목자” 관점에 따라 일관적으로 마태복음을 설명해내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신선한 면이 있는데, 그렇다고 자신의 주장을 설득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는다. 자기의 주장을 독자들에게 확신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 대신에 본문을 구약과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마태복음이라는 한 권의 책의 전체적인 흐름 안에서 명확하고 분명하게 설명해낸다. 이에 이어서 독자의 삶이 ‘보이는 설교’가 되기 위해 “삶으로 내리는 뿌리”를 통해 우리 삶에 말씀의 메시지를 적용하도록 돕는다. 그래서 본서를 읽을 때는 신학적인 고민이나 연구에 대한 욕구보다, 성경 말씀 자체를 겸손하게 읽고 싶은 마음과 치열하게 삶에서 그 메시지를 적용하기 위해 분투하기 위한 기대감에 고취되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본서가 신학적인 깊이가 얕지도 않다. 본서는 특히 구약의 신약인용에 있어서 탁월한 깊이를 갖고 있다. 구약의 본문을 임의로 훼손하지 않은 채 문맥에서 그 내용자체를 분명하게 해석한 후, 마태복음에 그 본문이 인용됨으로서 갖는 함의를 탁월하게 밝혀내고 있다. 자주 인용하는 종말의 다윗 목자 전승인 에스겔 34-37장, 스가랴 9-14장, 미가 2-5장 등 뿐만 아니라, ‘임마누엘’이라는 칭호를 아시야 7장을 배경으로 설명하는 내용이나, 예수님이 애굽에 들어가신 것을 호세아 11장과 관련해 설명하는 부분은 반복해서 읽게 될 정도로 좋았다.  

 

본서에서 아쉬웠던 작은 지점들

 본문 설명과 현실 적용이라는 책의 저술목적을 감안한다면 아쉬웠던 점은 비교적 사소한 것일 수 있다. 저자는 목자이신 예수님의 가장 강력한 성품으로 ‘긍휼’을 제시하고 그에 따라 책의 제목에도 “긍휼의 목자 예수”로 지었다. 그리고 팔복의 핵심으로 ‘긍휼’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궁금했던 점은, ‘긍휼’이라는 성품은 예수님이 갖고 계신 많은 미덕 중에 하나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사랑’의 예수님(요한일서 4:16)이라고 하면 그 누구라도 동의할 수 있지 않을까? 또한 예수님은 율법을 정리하시면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내세우시지 않는가? 그런데 저자도 이에 동의하면서 구체적인 논증 없이 ‘사랑’과 ‘긍휼’을 호환해서 사용하기 때문에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긍휼의 의미가 무엇일까 궁금했다. 사전적 의미의 긍휼이 “불쌍하고 가엾게 여겨서 도와준다.”는 의미인지라, 목자이신 예수님의 사역을 ‘긍휼’로 특정하면 ‘사랑’에 비해 많은 부분을 생략하게 되지 않는가 두려웠다.

 한편, 저자는 207쪽에 가서 본인이 생각하는 긍휼이 무엇인지 설명을 한다. 직접 인용하면, “긍휼은 스스로도 어찌하지 못하는 대상을 향해 느끼는 일방적인 사랑의 정열이다. 자기 속에서 불붙어서, 그 불로 그 대상을 살려내는 일방적인 사랑의 다른 이름이다.” 결국 저자는 긍휼과 사랑을 같은 의미로 이해하는데, 긍휼이 가지는, 사랑을 베푸는 대상의 상태와 사랑을 주는 이의 일방적인 신실함을 강조하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본서가 현 시대에 갖는 의의 

 본서는 이 시대 독자들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본서는 현세주의를 강력하게 비판한다. 현세주의는 ‘지금’, ‘여기서’ 내가 복을 누리고자 하는 강력한 욕구이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현대주의와 완전한 반대지점에 계셨다. 예수님은 긍휼의 목자로서 이 땅에 성육신하셨다. 저자가 “긍휼이란 상대방이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을 내가 대신 짊어져 주는 것이다.”고 말한 것을 볼 때 예수님의 제자로서 이 땅의 현실을 살아내는 우리는 ‘나’, ‘나의 복’을 위해 살면 안 된다. 철저히 우리의 삶을 이웃의 복지를 위해 내던져야 한다.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시면서 우리에게 기대한 것이 무엇일까?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영광이 결단코 뗄 수 없는 예수님의 한 인생에서 구현된 것을 볼 때, 우리 역시 십자가의 고난을 자처하는 삶으로 그분의 제자됨을 드러내야할 것이다. 

 현 시대는 정말로 ‘긍휼’이 필요하다. 개인주의를 넘어서 이기주의가 팽배한 시대, 분노와 혐오가 판치는 현실, 자본주의의 어두운 면을 닮아 인간을 상품화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작금의 세태 가운데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긍휼이다. 나를 내던져 이웃을 살려내는 십자가의 사랑이다. 그런 면에서 저자가 밝혀내준 예수님의 ‘긍휼의 목자’로서의 면모는 우리에게 가장 적실한 상(像)임이 분명하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모든 성도가 긍휼의 목자를 닮아가 삶의 설교를 감당할 것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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