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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부장의 타작마당
유진 피터슨의 “주와 함께 달려가리이다”는 예레미야서를 통해 본 예레미야의 ‘신앙적인 삶’과 ‘삶을 담은 신앙’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태초에 미리 아시고 선택하셔서 세워 보내신 선지자로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과 적대적이거나 피상적인 관계만 맺고 있는 이스라엘의 혼란스러운 현실에서 살고 사역했다. 하나님은 이러한 세상 속에서 예레미야에게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에서 우러나오는 최상의 삶을 살고, 또 다른 사람들도 그와 같은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전하도록 초청하셨다. 예레미야는 그의 전 생애를 통해 하나님의 요청에 응답하였고,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삶이 곧 하나님 없이 사는 세상을 향한 당신의 메시지가 되도록 하셨다. 사실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요청하신 구별된 삶은 예레미..
모든 죠이어를 위한 부르심 학부생 죠이어들과 ‘직업과 선교’라는 주제로 대화할 때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는 “간사님, 저는 그냥 ‘취업’해서 ‘보내는 선교사’로 살래요.”이다. 보내는 선교사가 재정 후원 이외에 어떤 역할을 감당하는지, 보내는 선교사로서 살겠다며 선택한 그 직업이 정말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에 근거한 것인지는 별로 고민하지 않는다. 단지 막연하게 갖는 선교에 대한 부담감이 그와 같은 대답을 이끌어낸 것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실제로 그들은 졸업 후에 자신이 선택한 직업에 충실하게 살아간다. 하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선교에 대한 부담감을 재정 후원으로만 상쇄하고 마는 것이, 그들이 학부 때 선교에 대해 받았던 도전의 크기에 비해서는 다소 아쉽게 느껴지기만 한다. 본서는 직업과 관련한 선교의 타입..
운전을 배워가면서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어려운 과정은 면허증을 취득하는 최초의 과정일 것이다. 새로운 기술을 배우는 과정이기 때문에 극도로 긴장하고 강사의 말 한마디 하나하나와 세세한 운전습관조차도 배우려고 애쓰기 마련이다. 꽤나 긴장되는 그 배움의 시간을 견디는 동력은 아마도 베스트 드라이버가 되어 있어서 도로를 활주하는 자신의 모습을 꿈꾸는데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일단 운전면허를 취득하고 어느 정도 운전에 익숙해질 때쯤이면 처음 운전을 배울 때의 조심성이나 적절한 수준의 긴장, 베스트 드라이버가 되기를 바라는 소망 정도가 확연히 사라지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왜 그럴까? 그것은 자신이 애초에 운전을 배우고자 했던 동기부터 살펴보는 것이 빠르다. 운전의 목적이 자신을 목적지까지 단순히 이동시키는 것에 있..
사실 개인적으로 간사로 지원하게 된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설교자로서의 도전’이었다. 감사하게도 학부시절에 탁월하신 간사님들에게 좋은 설교를 듣고 마음껏 영적 씨름을 할 수 있었고, 그 시간들이 당시에는 힘들었지만 결국에는 나를 영적으로 살찌워갔던 기억이 강하게 남아있다. 나 역시도 그런 설교자가 되어서 후배들에게 말씀으로 도전하고 싶었고, 실제적으로 말씀으로 한 사람이 변해가는 과정을 옆에서 보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다. 그렇지만 실제 간사가 되어서 현장에서 설교를 하며 지내온 지난 9개월 정도의 시간동안 내가 느낀 것은 철저한 무력감이다. 내 자신이 설교자로서 준비가 잘 되어 있지 않다는 반성과 함께 실제 캠퍼스 간사 사역은 설교만 할 수 있는 여건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현실적인 어려움도 깊이 느낄..
“다윗: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 이 책은 3학년 여름 수양회를 두고 새롭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자 찾아 읽었던 책이었다. 그 때 이 내용들을 얼마나 이해하면서 읽었는지 모르겠지만, 8년 후에 다시 읽으니 느낌이 그 때와는 조금은 다르게 다가온다. 두 가지 정도로 생각해보며 읽게 되었다. 첫 번째는 유진 피터슨이라는 저자에게 집중하여 보게 된 점이다, 사실 개인적으로 설교를 들을 때 가장 마음에 와닿는 것은 명확하고 논리적인 류의 설교이다. 삼대지 설교까지는 아니라 할지라도 설교를 들은 후에 무언가 분명한 명제가 기억에 남아있는 설교가 좋았다. 하지만 최근에 포스트모더니즘의 청중을 대상으로 한 이야기식 설교에 대한 도전을 많이 받으면서, 그리고 실제로 그런 류의 설교를 들으면서 생각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
언젠가 다이어리에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자기가 바라보고 있는 시각이 가장 균형 잡혀 있다 생각하지만.. 일단 자신이 얼마나 경향성이 심한 사람인지 깨닫는다면, 우리네 관계들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나는 최대한 상대방을 있는 모습 그대로 이해한다고 생각하지만, 이미 내가 갖고 있는 선입견과 가치관 등으로 인해서 상대방을 왜곡해서 인식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고 답답한 마음에 써내려갔던 일기였다. 그런데 이 짧은 글 속에도 세계관의 함의가 들어가 있다. 생각해보면 비단 인간관계 뿐 아니라,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그런 식으로 인식한다. 나와 타자, 혹은 대상이 직접적으로 대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어떤 인식의 틀이 존재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 틀을 “세계관”이라고 부른다. 세계..
이 책을 처음 추천받은 후 제목에서 오는 궁금증으로 인해 인터넷에서 먼저 검색해보고서는 새로운 전도방법을 소개하는 책이겠거니 하는 선입견을 가졌었다. 그런데 막상 독서를 시작하고 나서는 단순히 전도방법을 소개하는 수준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거대담론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이 독서 몰입도를 높여주었다. 그동안 복음주의권의 전도에 대한 노력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천국에서의 누림을 제공하고 싶은 마음에 복음의 한쪽만 강조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래서 막상 불신자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서부터는 교회에서 요구되어지는 수많은 삶의 변화들에 대해 적잖이 실망하여 떠나가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혹여 교회를 떠나지는 않는다 하여도 처음 복음을 들었을 때부터 구원의 의미를 내세에서 누릴 천국이라는 협소한..
89p. "과학이 신학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때 우리는 사실(facts)과 성경말씀(words) 중, 어느 하나도 거부할 필요가 없다. 그보다는 자연의 사실과 성경말씀에 대한 우리의 해석을 점검해 봐야 한다. 그 이유는 건전한 과학과 건전한 성경 해석은 항상 조화롭기 때문이다." , [창조와 시간], 휴 로스 149p. 프란시스 콜린스, [하나님의 언어] 유전자를 연구하다 보면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공통 조상을 갖는다는 사실을 피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림 < 인간과 침팬지 사이의 유사 유전자 (비타민 c를 만들어내는 유전자)가 같이 고장난 상태
@ 목적 : 하나님의 충족성을 기뻐하는 것 * 로마서 : 풍성함의 책 - 교리, 생명, 교회, 개인적인 편지 등 다양하게 읽힐 수 있다. - (1~3장) 당신이 자신을, 잃어버린 바 된 무력한 죄인으로 알게 되었을 때 / (4~5장) 아브라함처럼 믿을 수 없을 만큼 좋은 하나님의 약속, 곧 언약의 머리이며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예수님 때문에 당신을 받아들이신다는 약속을 믿을 때 / (6~7장)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로서 전적으로 거룩하게 살고 당신 안에서 육신이 성령과 싸우는 것을 발견할 때, 그래서 당신이 목표로 삼은 선을 결코 완전히 이루지도 못하고 당신이 내던진 악을 다 피하지도 못한 채 모순 가운데 사는 것을 발견할 때 / 그리고 이 모든 것 외에 '상실감과 무거운 십자가들'이..
임재(함께 있어주는 것)는 약함의 섬김이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은 그들의 연약한 부분에서 연약해지고, 그들이 연약해지는 입장에 처하는 것이다. 그것은 기꺼이 상대방이 당하는 고통을 겪는 것이며, 고통을 겪으면서 그 고통당하는 사람과 동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고통당하는 자가 되려고 시도하는 것과 다르다. 임재는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는 것을 수반하지 않는다. 그것은 상대방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암시를 주게 될 것이다. "나는 당신의 고통을 당신보다 잘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러니 옆으로 비켜 서십시오. 내가 당신을 대신하겠습니다." 오히려, 임재는 고통당하는 이가 노출되어 있는 일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연약함 가운데 상대방과 함께 있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