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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스토트, 그리스도의 십자가] 4장 사죄의 문제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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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스토트, 그리스도의 십자가] 4장 사죄의 문제

白부장 2014. 4. 7. 22:20

제2부 십자가의 핵심 중에서 첫번째 "사죄의 문제"


* 들어가며..

- 만약 우리가 서로 용서하듯이 하나님도 그렇게 단순하게 우리를 용서하실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죄의 심각성을을 심사 숙고해본 적이 없는 사람
- 죄라는 것은 단순한 위법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어긴 법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것이며, 따라서 죄는 하나님께 대한 반항이다.
- 사죄의 문제는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인간의 반항, 하나님의 본성과 우리의 본성 사이의 필연적인 충돌에 의하여 야기된다.
- 하나님의 사랑은 "거룩한 사랑"이다. 죄인들을 동정하면서도 동시에 그들의 죄를 용서하기를 거부하는 그런 사랑임을 기억해야 한다.
-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그 거룩한 사랑 속에서 우리의 불순종에 대한 완전한 대가를 하나님 자신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지불하셨다.


* 죄의 심각성

- 신약 성경이 죄를 표시하는 다섯 개의 헬라어 단어
1) 하마르티아 : 표적에서 빗나간 것, 목적지에 이르지 못한 것
2) 아디키아 : 불의, 부정
3) 포네리아 : 사악하거나 부패한 종류의 악
4) 파라바시스 : 침입, 침해, 즉 일정한 한계를 넘어가는 것
5) 아노미아 : 무법, 일정한 법을 무시하거나 어기는 것

- 각각의 경우 어떤 객관적인 표준 혹은 기준을 선정하고 죄를 그 기준에 이르지 못하거나 어떤 선을 고의적으로 넘어가는 것을 가리킴
- 기준 혹은 이상이 하나님에 의해 제정되었다는 것이 성경의 전제 : 하나님의 의로운 품성이 표현된 하나님의 도덕법
- 이 하나님의 도덕법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우리의 존재 법칙이기도 함
- 죄=불법 : 하나님의 권위와 사랑을 거스를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가장 큰 안녕을 거스려 행하는 것이기도 함

- 성경이 강조하는 바는 죄의 사악한 자기 중심성
- 우리의 피조성 속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의존적 위치를 거절하고 도리어 독립을 얻고자 노력함, 우리가 감히 우리의 자존(self-dependence), 우리의 자율성을 선언
-> 오직 하나님만이 점유하신 위치를 주장하는 일 : so, 죄의 본질은 바로 하나님을 향한 적대감(롬 8:7), 하나님께 대한 적극적인 반항에서 생겨남


* 인간의 도덕적 책임

- 죄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우리는 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온갖 핑계거리를 찾기 바쁘다. 유전자, 호르몬, 유전적 기질, 부모, 성장 과정, 교육과 사회 환경 등
cf) 개인의 책임에 대해 희석시키는 학자, 스키너 : "과학적 분석에 의하여, 책임과 성취는 모두 환경으로 환원되기 때문이다." (자기 결정적인 결정론)

- 전적으로 개인의 책임이라 몰아붙일 수 없지만, 모든 책임의 전적인 와해 역시 받아들일 수 없다.
- 아래 근거를 들어 논증

1) 형법 : 법의 준수 여부를 선택할 수 있는 힘이 사람에게 있다고 가정, 그에 따라 사람들을 취급
- 하트 : "모든 진보된 법 체제 속에서 중한 범죄에 대한 유죄 결정의 여부는, 범죄자가 법률이 금하는 외적인 행동을 했다는 사실에만 의존하지 않고, 그가 어떤 정신적 구조 혹은 어떤 의지를 가지고 그 행동을 했느냐는 사실에도 의지하게 된다."
- 멘스 레아(mens rea) : '유죄의 마음', 그 사람의 의도. 법률 적용의 가부는 정신적, 도덕적 책임, 즉 '멘스 레아'(마음과 의지의 의도)에 의하여 좌우된다.
-> 인간이 자유로운 결정자이며 자신이 내린 선택에 책임을 지는 존재라는 가정을 기초로 함

2) 다른 모든 상황에서도 마찬가지
- 인간의 정신은 인간을 단순한 컴퓨터 혹은 동물로 격하하는 모든 종류의 환원주의에 저항한다.
- 노만 앤더슨 : "보통 사람들이 가진 굳은 확신, 곧 일정한 한계 내에서는 선택과 행동의 참된 자유가 있으며, 따라서 이 자유는 필연적으로 그에 상응하는 만큼의 도덕적 책임을 수반한다는 굳은 확신이 잘못이라고 생각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고 단호하게" 주장할 수 있다.

3) 성경 : 우리를 제약하고 심지어 지배하는 압력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속에 영속하는 도덕적 책임 사이에서 우리가 느끼는 개인적인 긴장의 체험과 같은 긴장을 발견
- 원죄 : 우리가 물려받은 본성 자체가 자기 중심성으로 인해 오염되고 뒤틀려 있다는 것을 의미
- 그러나 오히려 성경은 변함없이 우리를 도덕적인 책임을 지는 행위자로 취급함 (ex) 순종과 불순종 사이의 결단을 요구,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선택할 것을 명령 등)
->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 사이의 궁극적인 이율 배반이 존재 :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책임은, 인간 존엄성의 양도할 수 없는 측면

4) 에밀 브루너
- 책임은 하나의 속성이 아니라 인간 실존의 '본질' 그자체다.
- 인간은 자신의 연약함을 근거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 그의 인격의 중심인 인간 자신이 자기의 죄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것이다."


* 참된 죄책과 거짓된 죄책

- 로마서에 드러난 바울의 인간 분류

1) 진리와 선의 빛을 고의적으로 배척하는 자들 (롬 1:18~32)
- 로마 사람들은 피조물을 보고서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을 알았고 그들의 양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알았으면서도, 그러한 지식에 부응하는 삶을 살기를 거부
2)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들 (롬 2:1~16)
-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지식을 성경에서 얻을 수도 있고(유대인), 그들의 마음 속에서 얻었을 수도 있지만(이방인), 자기의 지식에 합당하게 살지 않는다.
3) 자기들이 자랑스러워하고 가르치는 그 율법에 불순종하는 자들 (오 2:17~3:8) : 특별히 유대인의 세계

->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다. (롬 3:9)
우리 모두 변명할 수 없다. 온 세상은 죄가 있으며, 하나님 앞에 책임이 있다. (롬 3:19~20)

- 성경이 말하는 이런 죄책들이 지나친 병적인 관점이 아닐까? 라는 반론이 있다.
ex) 니체 : "기독교는 병을 필요로 한다. 구원 절차에서 교회의 전체 체계의 감춰진 진짜 목적은 병을 일으키려는 것이다... 사람은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기독교를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병드는 것이다."

- 그러나 현대의 이런 무신론적 주장들은 실존하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자기는 죄도 없고 잘못을 범하지도 않는다고 공공연히 떠드는 사람들이 더 악한 병에 걸려서 고생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중심성을 시인하는 일, 회개의 겸손함이 그들에게도 필요하다. 우리의 죄의식을 통해 도리어 바른 길을 가게 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축복일 것이다. (예 : 탕자 비유)
cf) 어떤 심리학자들과 정신과 의사들도 기독교신앙과 상관없이 우리가 죄, 책임, 죄책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주장함
. 호바트 모우러 : 우리가 죄의 실체를 부인하는 바로 그만큼, 우리는 근본적인 치료의 가능성에서... 멀리 떨어져 있게 된다.
. 윌리엄 글래서 : 현실 요법 - 환자가 자기 행동에 대한 책임이 자기에게 있다는 것을 회피하려고 노력하면서 살아 왔다는 사실을 직면하는데서 치료를 시작
. 메닝거 : 호바트 모우러 박사도 비슷하지만, 죄를 "회개, 수리, 배상 그리고 속죄"로 다루어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용서라는 개념, 십자가는 배제됨

-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행위에 책임을 지게 하고 하나님의 심판의 위험을 경고하기 위하여, 또한 사람들에게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고 그리스도께 돌아오라고 권하기 위하여 죄의 심각성과 구속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것은 건전한 일이다.

- 인간의 책임을 완전히 인정하고 그리하여 인간의 죄책을 완전히 시인하는 것은, 인간 존재의 존엄성을 감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고양시키는 것이다.
- 성경이 죄를 심각하게 취급하는 것은, 성경이 인간(남자와 여자)을 심각하게 취급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행동에 책임을 지는 존재라는 사실은 인간됨의 영광의 일부다.

cf) C.S. 루이스 "인도주의 형벌론"

"어떤 사람이 자기의 의지에 거스려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것, 또한 우리가 질병으로 간주하지 않을 수도 있는 어떤 상태에 대하여 그가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그가 아직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연령에 도달하지 않았거나 이성적으로 생각하려는 의지가 없는 사람의 수준으로 취급되며, 유아, 저능아, 가축으로 분류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형벌이 아무리 엄하다 할지라도 우리가 응당 그것을 받아야 한다는 이유와, '우리가 더 잘 알았어야 한다'는 이유로 그 형벌을 받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으로 취급된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거룩과 진노

- 십자가의 본질적인 배경은, 인간의 죄, 책임, 죄책 뿐만 아니라 이런 것들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운 반응 곧 그분의 거룩과 진노도 포함한다.
- 하나님의 거룩에 밀접하게 연결된 것이 그분의 진노인데, 사실 이것은 악에 대한 그분의 거룩한 대응이다.
- 거룩과 사랑이라는 두 양극의 성품이 하나님 안에서는 절대 갈등되지 않는다.
-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진노(예수님도 타락한 본성의 행위 중으로 인식하신 그 진노)하실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 입증되지 않은 주장
cf) C.H. Dodd의 로마서 주석 :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하신다" 하지만, "진노하신다"라고 쓰진 않음. (동사의 경우)
(명사의 경우) 오르게(분노 혹은 진노) : '기묘한 비인격적 방식'으로 사용
-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태도를 묘사하기 위함이 아니라 도덕적 세계에서의 인과라는 필연적 과정을 묘사하기 위함이었다는 것.
A.T. Hanson : 바울에게 진노의 비인격적 성격이 중요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비인격성 때문에 바울은 진노를 곧장 하나님께 돌리지 않아도 되었으며, 진노를 하나님의 속성이 아니라 죄인들이 스스로 자초하는 과정으로 바꿀 수가 있었다.

-> John Stott
1) 바울과 요한은 정확하게 "하나님의 진노"라고 지칭함
2) 바울이 비인격적인 표현들을 채택한 이유는 하나님이 결코 화를 내지 않으신다고 단언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분의 분노는 어떠한 인격적 악의의 색조도 없는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일 것. cf) 은혜(카리스) & 진노(오르게)
3) 하나님의 진노는 악에 의해서만 일어나고, 악에 대한 정죄 속에서만 표현되는, 하나님의 계속적이며 확고한 적대 (적대자에 대해 감소되지 않은 사랑을 유지하시는 하나님)

- 거룩과 진노, 절대 죄와 병존할 수 없다는 진리. 이 것을 예증하기 위해 성경에 사용된 은유
1) 높음 (height) : 하나님의 타자성(otherness)을 명확하게 전달해줌
2) 거리 (distance) : 불붙는 가시나무 덤불 속 하나님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지성소 앞에 휘장을 드리우심, 언약궤(웃사의 죽음) 등
3) 빛 :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심. "아무 사람도 볼 수 없다."
4) 불 : 진리를 고의적으로 배격하는 사람들에게는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5) 인간의 몸이 독을 토해내는 것 : 거룩한 하나님이 악을 배척하시는 것

-> 현대인에게는 낯선 개념. 현대인이 매력을 느끼는 하나님은 우리의 잘못을 손쉽게 눈감아주는 그런 하나님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 우리는 먼저 죄인들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음을 본 후에에 비로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게 해주신 사실을 감사할 수 있다.
- 우리의 눈을 멀게 하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을 우리가 일별하였을 때, 또한 성령에 의해 우리의 죄를 깊이 느낀 나머지 하나님 앞에서 떨며 우리가 '지옥에 떨어져 마땅한 죄인들'임을 인정할 때, 그때에만, 오직 그때에만 우리는 십자가의 필요를 깊이 깨닫고 이전에 우리가 십자가의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에 경악하게 된다.

- 그러므로 십자가의 본질적인 배경은, 죄의 심각성과 하나님의 위엄에 대한 균형잡힌 이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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