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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스토트, 그리스도의 십자가] 3장 심층적 진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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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스토트, 그리스도의 십자가] 3장 심층적 진리

白부장 2014. 4. 2. 07:28

제1부 "십자가를 향하여" 중에서 3장 심층적 진리


* 예수의 십자가에는 어떤 중요성이 있길래 그렇게 끔직한 형벌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계획하시고, 예수님은 감당하셨을까?

1.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 그 분의 죽음은 이타적이고, 은혜를 베푸는 것이다.

2.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고자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벧전 3:18)
- 그분의 죽음이 지니는 은혜로운 목적은 우리의 화목에 초점이 맞춰진다.

3.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
- 우리의 죄는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은사를 가로막는 장애물, 그러므로 그 은사가 주어지기 위해서는 먼저 죄를 제거해야 했음
- 그분의 죽음은 이 죄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음

4.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죽음을 대신하신 것이다.
- 그분의 죽음과 죄의 연결은 단순한 결과적인 연결(그분이 우리의 잔인성의 제물이었다는)뿐만 아니라,
- 형벌의 연결(그분이 무죄한 인격으로서, 우리의 죄가 받아야할 형벌을 담당하셨다는)이라는 말이다.
- why? 성경에서는 인간의 죽음을 자연적인 사건이 아니라 형벌의 사건으로 본다.
cf) 원래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종말은 에녹과 엘리야가 경험한 '옮겨감' 혹은 예수님 재림 때 산 자들에게 일어날 '변화'와 비슷한 종말이었을 것
- 그분은 스스로 십자가로 가기 위하여 우리의 세상으로 다시 오셨다. 신약성경은 죄가 없으므로 죽을 필요가 없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가 담당해야할 죽음을 죽으셨다고 단언


* 위의 네가지의 가장 기초적인 신학적 구조가 사실에 부합하는가?
= 십자가 이야기에 억지로 신학적 이론을 부과한 것인가? 아니면, 복음서 서술 자체가 이 신학적 구조를 만들어 내는가?

cf) 예수님의 마지막 24시간의 지켜보면 어떤 우울이나 실패감 등을 느낄 수 없다. 한창 나이 30-35세의 요절이나, 사명을 완수하기 전의 시기상조 죽음으로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그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사명을 수행하는데 실제로 필요한 것으로 여기신 것을 느낄 수 있다. 전 인생을 그 한 순간을 위해 기다리신 것처럼 달음질 하셨다.


1. 다락방 최후의 만찬

* 예수님의 성만찬 거행 : 여기에 드러난 예수님의 행동과 말씀은 자신의 죽음에 대한 스스로의 견해를 확실히 밝혀준다.

1) 예수님의 죽음의 중심성
-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정기적인 식사나 예배로 반복하라고 말씀하심
- 떡(몸) & 포도주(피) : 그분의 죽음을 극화하여 기념한 성만찬 -> 예수님 스스로가 그분의 죽음으로 기억되길 원하심

2) 예수님의 죽음의 목적
- 하나님과 그 백성과의 새로운 협정
cf) 아브라함 언약(좋은 땅 & 많은 자손) - 시내산 언약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겠다는 약속 / 희생의 피로 확증) - 새언약(예레미야 31:31~34)
- 다락방에서 예수님의 언약 : 하나님이 지정하신 이 죽음에 의하여 새 언약은 **사죄의 약속**과 함께 확증될 것

3) 그분의 죽음을 각자가 개인적으로 전유해야 할 필요가 있음
- 제자들은 성만찬의 단순한 구경꾼이 아니라 함께 참여한 자들
- 그분이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자기의 살과 피를 주셨다는 것과, 그분의 죽음으로 인한 복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삼는 것은 별개의 일
- 하나님은 좋든싫든 우리에게 자신의 선물을 강요하지 않으시기에 우리는 믿음으로 그것들을 받아야 한다.
* 다락방 사건과 주의 만찬의 의미를 더욱 선명하게 만드는 것은 그것들이 유월절을 배경으로 한다는 점
: 최후의 만찬은 유월절 식사(막14:12~16, 눅22:15), 식사 후 유월절 양을 잡아서 제사를 지내는 절차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 제물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이와 같이 유월절 예식과 십자가를 연결 짓는 것도 그리스도의 죽음을 각자 개인이 자신의 것으로 전유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
: 장자를 대신하여 양을 도살하여 그 집 문설주에 피를 바를 때에만 그 죽음이 넘어감을 경험했기 때문에


2.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고뇌

- 겟세마네에서의 예수님의 감정
: "받을 세례"가 있으며 그 일이 끝날 때까지 '답답함'(압박감, 고통을 당함)이 있음 /
'민망하여서'(동요되어서) 자기를 구해달라고 아버지께 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하셨다.
-> 예수님이 불안한 마음으로 혹은 거의 공포에 가까운 심정으로 자신이 겪을 앞으로의 시련을 내다보셨을 때, 매우 극심한 고통을 느끼셨으며 땀을 뻘뻘 흘리셨다.

- 소크라테스도, 순교자들도 죽음에 초연했는데 정작 예수님을 이토록 고통스럽게 한 것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예수님이 피하고자 했던 그 잔의 의미는 무엇인가?)
: 육체적 고통이나 백성들에게 멸시와 버림을 받는 정신적 고통 등을 상징하지 않는다.
온 세상 죄를 짊어진다는 영적인 고뇌, 그 죄 위에 떨어지는 하나님의 심판을 견뎌야 한다는 영적인 고통
cf) 구약 성경의 용례 (지혜서와 선지자들의 글들) : 잔 = 하나님의 진노를 가리키는 일반적인 상징 (욥21:20, 겔23:32~34, 시75 등)
-> 예수님의 무죄한 영혼은 인간의 죄에 접촉하는 것을 회피하고자 멈칫거렸던 것. 죄에 대한 심판이 가져다줄, 아버지로부터 소외되는 경험에 대하여 그분은 두려움을 느끼고 뒤로 물러나신 것.

- 임박한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명상하는 가운데, 예수님은 결국 평온하고 단호한 확신과 함께 두려움의 고뇌에서 벗어나셨다. (요18:11)


3. 십자가 위에서의 유기의 외침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시편 22:1을 인용)

*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가 우리의 죄와 저주를 "담당하신다"는 것보다 실제로 우리의 죄와 저주가 "되신다"는 개념

1) 분노, 불신앙 혹은 절망의 부르짖음 x
- 예수님의 인격의 도덕적 완전성을 부인, 예수님이 가장 위대하고 숭고한 자기 희생의 순간에 실패하시고 말았다고 비난하는 셈

2) 고독의 부르짖음 x
- 시 22:1이 단지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느낌"만이 아니라, 실제로 버림받은 "상태"의 경험을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

3) 승리의 외침 x
- 시 22편이 마지막에는 큰 확신, 승리로 끝을 맺는 시편임을 착안
- 그런데 정말 그런 의도시라면 굳이 맨 앞절만 인용하셨을까? 아니다.

4) 진짜 유기의 외침 o
- 실제적이고 무서운 분리가 성부와 성자 사이에서 일어남, 그리고 이 분리는 성부와 성자가 자발적으로 받아들이신 것
- 그 분리는 우리의 죄와 거기에 해당되는 공평한 보응으로 말미암았다.
- 예수님이 단순한 느낌뿐만 아니라 실제로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진리
- 하지만 동시에 복되신 삼위 하나님 연합은 그 때도 깨어진 것이 아니라는 역설

* 결론적으로 말해서 십자가는,

1. 우리의 죄는 너무나 끔찍한 것임에 분명하다.
2.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이해를 초월할 만큼 놀라운 것임이 분명하다.
3. 그리스도의 구원은 값없이 주시는 선물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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