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부장의 타작마당

김형석의 <<기독교, (아직) 희망이 있는가?>> 본문

독서노트/두피플 2기

김형석의 <<기독교, (아직) 희망이 있는가?>>

白부장 2020. 12. 1. 00:30

 

Part 1. 100년 후에도 희망이 되는 기독교를 위하여 

1. 미래의 기독교는 인간적 권위의식에서 나오는 모든 권위주의를 그리스도의 교훈과 뜻이 성취되는 신앙적 질서로 정착시키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2. 신앙의 공동체인 교회는 필요하지만 교회주의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요청이다.

3. 교권주의 또는 교권의식을 축소하거나 불식시키자는 것이다.  

저자는 한국교회가 지금의 정체(혹은 후퇴)를 극복하고 미래의 희망이 되는 기독교가 되기(혹은 회복되기) 위하여 위의 세 가지를 제시한다.

권위주의, 교회주의, 교권주의를 넘어서 만인이 따를 수 있는 진리를 통해 교회 안팎에서 인권과 인격의 가치를 고양하는 그 방향이 바로 기독교가 100년 후에도 쇠퇴하지 않고 희망이 될 수 있는 방안이 될 것이다. 

 

Part 2. 인간다움을 회복하는 기독교

신앙적 고취는 종교적 행위의 천착에 고착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적 토양에서 배양된 신앙적 열매는 교회 안에 머물러 그 밖 세상으로 나가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특히 종교개혁의 <이신칭의> 교리가 혁신적인 전환을 세상에 가져온 이후에, 오히려 신앙은 내면 안에서의 신학적 역동으로 오해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저자는 "앙은 앎을 포함하면서도 실천에 옮겨질 때 완전해진다. 그래서 신학의 내용은 실천을 통해 입증된다."고 바르게 지적한다. 또한 도산 안창호 선생이나 고당 조만식 선생과 같이 기독교 정신으로 한 시대의 구조적 악에 맞서 싸운 이들을 사례로 들어가며 이웃과 (나아가) 국민의 고통에 참여하는 행위를 신앙인의 의무와 책임으로 당연시한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다 주님의 엄정한 요청이(자 삶의 모범이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깊었던 내용은 "참된 목회는 인간 이해에서 나온다"는 일갈이었다. 물론 교단 신학 아래서는 다소 거부감이 들 수 있는 구절이지만, 목회를 준비하는 입장에서 아래의 말을 계속 곱씹게 된다.

목사들이 심리학을 공부하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상식으로라도 터득한다면 수많은 신도에게 안식과 평안을 베풀어줄 수 있을 것이다.   

보수신학의 기치 아래 모인 목회자들에게는 프로이트가 사단의 하수인처럼 보일지 모르겠다. 물론 그의 모든 내용을 다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보수적인 한국교회의 맥락에서 위와 같은 논쟁적 제언이 계속 맴도는 이유가 무엇일까? 저자는 이를 예수께서 환자를 치유할 때 방향했던 세 가지-질병의 치유, 정신적 위로와 안식, 믿음에 따르는 신뢰와 희망의 회복-의 맥락에서 도움이 될만한 채널로 이해했던 것이다. 저자의 당부처럼 "우리도 인간을 사랑한다면 인간을 알고 이해하는 책임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심리학이나 기타 세속의 학문을 어떤 비교우위로 두는 차원을 말하지 않고, 인간을 제대로 알기 위해, 사랑을 구체화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자는 일갈이 마음에 깊이 새겨진다. 

 

Part 3. 민족에 희망을 주는 기독교

저자는 우리 교회가 위치한 한국의 맥락을 <유교의 전통>에서 찾는다. 유교 전통이 모든 인간 관계를 상하-수직관계로 인식하게 하는 프레임을 우리 민족에게 씌워서 발전적인 평등 관계와 사랑의 관계로 접어들지 못하게 한다는 적확한 지적은 우리 모두가 유념할 필요가 있다. 어쩌면 이와 같은 분석에 부합하는 사례로, 바야흐로 다양성이 높아진 한국사회에서 교회 안의 다양한 은사를 고루 사용하기 위한 사역 방향성 중에 하나인 팀 사역이 한국교회에서는 불가능하다고 하는 보고들을 들 수 있지 않을까? 이 역시 한국교회에 스며들어 있는 유교 전통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저자는 오륜-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의 인간관계 질서가 우리가 알지 못하더라도 우리 모두의 관계 안에 잠식되어 있음을 통찰하였다.

1. 부자유- 친밀의 질서를 효의 질서상하관계로 바꿔 버려서 부모를 위한 자녀의 의무를 강조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런 상하관계가 굳어질수록 가정과 사회가 더 불행해진다고 분석한다. 오히려 가장 소망스러운 방향은 친애를 실천하는 가족관계일 것이다. 

2. 군신유 -  충이라는 상하관계로 개편하여 임금들이 죽을 때까지 왕권을 유지하고 나아가 자녀들에게 물려줄 때까지 신하들은 그의 죽음도 당연하게 왕에게 바쳐야하는 의무를 강조한다. 그러나 "자유와 평등을 지킬 의무"로서의 애국을 이해하는 발전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3. 부부유 - 부부간의 다름을 부부간 차별, 남존여비의 전통으로 이해한 것이 우리나라의 맥락이다. 그러나 우리가 소망하는 관계는 바로 사랑의 관계, 평등한 지위에서 흘러나오는 성숙한 사랑임은 두말 할 나위 없다.  

4. 장유유 - 우리는 일찍부터 연장자에게 순종하며 젊은이들이 어른을 공경하게 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았다. 이것을 통해 사회의 베터랑들에 대한 존중이 문화적으로 장점으로 여겨질 수 있으나, 그 반면에 사회적으로 중요한 일을 할 수 있는 후배들이 소외되어서는 안 된다. 기독교 가치를 제고하여 가치관과 인격의 평등관계로 환원시켜 서로를 이해하는 관계로 승화시키는 것은 우리의 몫이라 할 수 있다. 

5. 붕우유신 - 비교적 평등의 개념으로부터 출발되는 덕목 같으나 이 역시 모두 상하관계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한편, 저자는 서양적 가치인 이성과 동양적 가치인 온정을 편견을 배제한 채 공존시키길 원했다. 그러나 우리가 동양적 온정주의가 깊이 뿌리박힌 세월을 지내왔기 때문에, 합리적 사고와 가치관을 고양하여 인격적 완성에 도달하자고 전략적으로 주장한다. 이 부분을 더욱 주목해야할 것은, 특히 한국교회의 목회적 맥락이 따뜻한 관계의 코이노니아에만 기초를 두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더욱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한국교회 강단에서 이성적 사고를 기반으로 한 설교와 가르침이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되는지, 사역자들이 먼저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저자도 주목하듯이, 한국교회 청중들의 학력이 높아지면서 목회자가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세상의 현안에 대해 어떠한 안목으로 접근하는지 등에 대해 훨씬 더 날카로운 평가들이 쏟아지고 관심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얼마 전에 중학교 학생에게, 학교에서 배우는 과학적 사고와 교회 안 성경 이야기가 충돌될 때 어떻게 이해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질문을 받았다. 이러한 고민이 과연 학생들, 미래 세대에게만 있을까? 어떻게 지혜롭게 대답해줄 수 있을까 진지하게 고민할 때(아니, 이미 지난 게 아닐까...)이다. 오히려 한국교회 강단이 이 때가 기회다 여기면서 사역자의 합리성을 제고할 필요가 있다. 

 

Part 4. 예수의 뜻을 실천하는 기독교

많은 이야기들 중에 저자가 기독교인의 직업관에 대해 언급한 내용은, 소위 모든 평신도들이 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모든 가치 있는 일은 이웃과 사회에 대한 봉사이다"고 주장한다. 단지 월급을 위해, 사회적 명예 혹은 권력에 대한 유지방안을 위해 직업을 갖는 것은 기독교 정신에서 어긋난다.

다른 사람에게 주기 위해 일하는 사람, 일을 사회와 이웃을 위한 봉사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그 일을 통해 사람을 위하고 섬기는 가장 고귀한 임무를 다하게 된다. 보물을 하늘나라에 쌓아두라는 가르침은 바로 그런 뜻이다.        

하늘에 보화를 쌓아두는 행위는 교회봉사만 있지 않다. 전도나 선교 등에만 있지 않다. 저자가 말하듯 나의 직업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주 안에서 섬기는 그 사랑의 봉사가 하늘에 닿는다. 우리의 직업은 돈을 벌어 헌금으로 교회를 돕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부차적인 정체성이 아니다. 너무나 분명하게도 각자의 직업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삶의 자리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할 영역은 교회와 교회 밖 세상의 "모든" 영역임이 분명하다.  

 

한국교회가 성도들에게 가르쳐야하는 내용은 자기신앙의 강화를 위한 단순한 교리나 교회 안에서 탁월하게 봉사해낼 수 있는 종교적 기술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의 뜻을 사회 안에서, 삶의 맥락에 적용하고 실천할 수 있는 진리에 대한 구체적인 통찰과 고군분투하면서도 끝까지 세상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임을 포기하지 않는 강한 체력이다. 다음의 아래의 내용을 보라.

얼마 전 한 정치인으로부터 현재 부정 청탁, 뇌물 수수 등 불법행위와 관련되어 법적 조사와 제재를 받고 있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교회의 장로들이라는 애기를 들었다. 그것도 대형 교회의 장로들이라고 했다. 그들이 대통령과 함께 조찬 기도회에는 열심히 참석했던 모양이다.  

이러한 삶이 과연 성경적 가치관으로 가능할까? 하나님께서 이들이 내는 십일조와 헌금을 귀하게 여기실까? 우리는 이들의 삶에서-세상에서 성공하고 고지를 차지한 그들의 종교가 기독교라고 해서-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크리스천 정치인들은 새로운 발상과 도덕관을 갖고 정치에 임해야 한다. 기업인들은 소유욕을 줄이고 사회에 기여하는 마음으로 사업에서 모범을 보여주어야 한다. 교육자들은 학생들의 장래와 인격을 위해 부단히 연구하며 개선하는 일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학자들과 예술가들은 아름다운 인격과 선한 질서를 해치지 않으며 인간 목적관에 부합하는 연구와 창작에 뜻을 두어야 한다.  

우리 모두가 교회 안에서 배운 성경적 가치관으로, 교회 밖 세상에서 이렇게 살아야 한다. 드러나지 않더라도, 주목받지 못하더라도 묵묵히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주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 그럴 때에야, 우리에게 여전히 희망이 있다. 교회에 실망감도 있지만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여전히 소망을 두는 모든 신자에게 본서를 권한다. 저자가 주장한 내용과 그의 삶이 다르지 않은 바, 독서하는 우리에게 큰 울림이 있을 줄 믿는다. 

 

* 이 책은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작성된 서평입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