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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논문] "개혁주의 교부학의 가능성" (요약 및 느낀점)

白부장 2021. 11. 4. 20:33

<요약>

1. 서론 

  초창기 번역상의 어려움으로 인해 학자들 간 용어의 혼동이 있기는 하지만, 보통 교부와 관련된 학문영역을 교부학이라 하고, 이는 교부들의 문헌을 바탕으로 그들의 생애, 저작, 사상, 후세에 미친 영향 등을 다룬다.

 한편, 교부학을 둘러싼 카톨릭과 개신교의 이해와 접근법에 미세한 차이가 있는데, 그 비중에 있어서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개신교는 ‘종교개혁’의 영향력이 워낙 막강하여 상대적으로 초대교회의 연구는 보조적인 것을 취급하는 경향이 있고, ‘오직 성경’의 모토로 인해 성경언어를 강조하느라 라틴어에 소홀하며, 성경의 권위 아래에 교부들의 가르침이나 전통을 두기 때문에, 교부학 영역에 많은 투자를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연구 작업 대부분을 카톨릭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된다면, 교부 및 초대교회 연구에 대한 내용과 질, 양 모두에 있어서 심각한 불균형을 초래할 것이다. 종교개혁의 목표 중 하나가 초대교회의 회복이었고 분명 초대교회사는 신구교 모두의 역사인 것을 기억하면, 개신교의 교부학 홀대는 재고되어야할 문제이다. 심지어 루터나 칼빈과 같은 종교개혁의 핵심에서도 성경의 정신과 부합하다면, 교부들의 입장이나 전통적인 관습이라 할지라도 자유롭게 사용했던 것을 기억하면 더욱 그리하다.

 

2. 본론

 교부라고 불리기 위해서는 고대성, 교리의 정통성, 모범된 생활, 교회의 인준, 네 가지 조건을 충족하고 일반적으로 8세기까지의 인물이어야 한다. 대체로 카톨릭과 개신교에서 승인한 교부는 비슷하다. 다만 충돌의 소지가 있는 부분은 교부의 권위 문제이다. 카톨릭은 성경해석에 있어서 ‘자연 논리의 명제’에 따르고, 신앙과 윤리에 대해서도 다수의 의견을 따르는 경향을 보인다. 이로 보건대, 카톨릭에서 교부의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교회의 결정이고, 그로 인해 성경이 설 자리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개신교는 어떠한가? 칼빈은 교부들의 가르침을 교부 자신의 권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경의 권위 아래에서 ‘활용’하였다. 초대교회의 교사들, 교부들의 가르침이 당시 로마 교회보다 교리 측면에서 훨씬 건전했다고 여겼기 때문에 성실하게 그들을 연구하고, 또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다. 다만, 언제나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고 충실한 경우에 국한하여 동의하고, 공인된 저작들에서도 인간적인 오류가 있음을 지적하여 성경의 명백하고 확실한 증거에 따르지 않는 경우에는 비판의 칼날을 들이댔다. 

 

 칼빈이 사용한 초대교회 인물들의 인용문을 분석해보면, 종교개혁의 사상과 실천이 깊어질수록 교부에 대한 의존도가 증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칼빈은 성경 주석과 관련해서 교부들을 많이 활용하고, 때로는 성경의 권위로 교부들의 사상을 비판할 목적으로 인용한 경우도 상당하다. 이는 ‘오직 성경’ 원칙에 근거하여 ‘교부 자료’를 자유롭게 사용했음을 보여주는 객관적인 증거이다. 교부의 명망성이나 저작의 탁월성 등을 존경하고 인정하지만, 그 때문에 무조건적인 권위를 부여하지는 않고, 성경을 절대적인 기준 삼아 교부가 속한 시대의 맥락 속에서 그들의 한계와 장점을 적절하게 잘 평가하였다.

 

3. 결론 

 개신교가 카톨릭에 대해 연구측면에서 의지하는 경향이 심해지면 무의식적으로 카톨릭적 해석을 수용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칼빈처럼 교부들을 개신교의 대의를 지지하는 수호자로 활용하면서, 우리의 교회 생활을 더욱 풍성히 하는 촉매제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신학교 커리큘럼에 교부학을 포함하고, 라틴어 강좌를 활성화하는 것이 그 시작점이 될 수 있다. 

 

 

< 느낀 점 >

 기존에 초대교회를 말하면 떠올랐던 이미지는 사도행전 2장에서 구현된 ‘코이노니아’의 교회였다. 그 외의 그림들은 그려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라는 구호에서 공동체적인 나눔과 자기희생적 사랑 말고는 다른 구체적인 내용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우리의 현실과 신약의 교회 사이에 적용할 점을 풍성하게 찾아내지 못했다.

 더불어 종교개혁에 대해서도 단편적인 이해만을 갖고 있었다. 인쇄술의 발달로 인해 성경이 보급되면서 가져온 신앙적 삶의 변화와 ‘오직 성경’, ‘만인제사장’ 개념 등이 불러온 신학적 개혁과 교회의 민주적 강화 정도만 파편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개혁주의 교부학의 가능성”에 대한 소논문을 읽으면서 내 생각을 점검하게 되었다. 명확하게 진술되어 있듯이, “종교개혁의 목표 중의 하나는 ‘초대교회로 돌아가자!’였다“는 점이 기존에 초대교회에 대해 갖고 있던 내 단편적인 생각을 돌아보게 했다. 단지 교제와 친교의 가족/병원의 모임이 아니라, 증인으로서 분명한 교리를 수호하기 위한 학교/군대의 공동체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한다.

 또 종교개혁은 미래지향적이고 현실 개혁적이었다는 명제적 사고 안에 갇혀 그 풍성한 본래 의미를 담지 못하고 생각을 멈춰버렸던 과오도 스스로 지적하게 됐다. 종교개혁은 이전의 모든 교회의 역사적 진행을 모두 거부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신학적 쿠테타라는 인식의 나이브함을 보게 된 것이다. 종교개혁은 어느날 뚝딱 하늘에서 떨어진 이벤트가 아니다. 개혁의 사상가들은 거인의 어깨 위에서 세상을 바라본 그 어떤 연속선에 있었던 사람들이다. 신앙의 선조들로부터 누적된 하나님의 계시의 역사에 대한 탄탄한 기반 위에 새로운 돌파가 일어난 것이 분명하다.

  

 소논문이지만 초대교회와 종교개혁에 대해 갖고 있던 단편적 사고의 큰 틀을 바꾸었다. 정리하면, 종교개혁의 방향성이 된 초대교회는 어떤 공동체였을까? 단순히 사랑의 교제가 넘치는 교회였던 것만이 아니라, 교리가 다른 어떤 시대의 교회보다 건전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쩌면 종교개혁을 통해 바르게 인식한 성경의 권위에 대한 이해와 해석의 가능(방향)성이 초대교회와 닮아 있는 것은 당연지사일 것이다. 칼빈도 초대교회와 교부들을 깊이 연구하고 또한 그 결과를 자유롭게 성경의 권위 아래 활용했을 정도라니, 이전과 논문을 읽고 난 후의 생각의 전환의 갭이 상당하다.

 

< 한국 교회에 적용점 >

 개인적인 진단으로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점 중에 하나는 “신학적 협소함 및 보수화”라고 생각한다. 보수적인 것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내 것을 지키기 위함이라는 명분으로 넓고 다양한 신학 스펙트럼을 포기하고, 신앙적 강직함이라는 미명 아래 신학적 협소함을 자처하는 것이 나는 우리의 집단적 한계라 생각을 한다. 성경 해석적인 측면에서도 문자주의적으로 경직돼가고, 선교적인 의미에서도 타학문 혹은 세속 세계관과의 교류를 차단해가며 우리 스스로를 게토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다는 반성이 있다. 경험적으로도 초교파적인 선교단체 안에서 일하면서 만나는 젊은 대학생들이 기존 교회에 갖고 있는 불만들이 이에 다름없다는 것이 내 판단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어쩌면, 개신교 공동체 안에서 교부학에 대해 깊이 연구하여 카톨릭적 교부학이 아니라 우리의 교부학을 제대로 공부하기 시작하면, 우리의 한계를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는 신학적 풍성함을 경험할 것이라는 기대가 생긴다. 신학과 교육과정 가운데 “교부학”을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교과목을 설치하여 일단 목회자와 설교자로 성장할 신학생들이 다양한 신학적 지평을 연구하고 공부하는 가운데 성경의 풍성한 함의를 교회사 안에서 공부한다면 좋겠다. 복음의 증인된 사도들과 멀지 않았던 교부들의 지혜를 계승하고 또 성경의 권위 아래에서 그들의 신학을 비판적으로 수용한다면, 얼마나 우리 개신교가 신학적 다양함을 수용한 가운데 진리에 더욱 깊이 천착할 수 있는 기회가 될까 소망이 생긴다. 아무쪼록 교회를 섬길 지도자를 배출하는 신학교에서부터 획기적인 전환이 일어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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