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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지혜서 연구] 제4장 전도서 본문

독서노트/대략, 요약

[구약 지혜서 연구] 제4장 전도서

白부장 2020. 4. 8. 09:16

제4장 전도서_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받아들임

 전도서는 어휘나 문법, 구문 등에서 욥기만큼 어렵지 않은 편이고 책의 구성이 특별히 난해하지도 않다. 다만 책 안에 존재하는 진술들 사이의 많은 모순들 때문에 이 책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욥기가 해석자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 합의를 이룬 큰 틀이 존재하는 것과 달리, 전도서는 해석자 수만큼 다른 해석이 존재한다 할 정도로 해석학적 숙제를 안고 있는 책이다. 특히, 전도서는 그 고유의 난해성 때문에 그 시대의 필요와 편견, 시대정신에 지배를 받으면서 전체를 포괄하지 못한 채 해석적 편향을 가지고 소비되어 왔다. (대표적으로 전도서를 쉽게 ‘도덕화’하여 단순한 교훈서로 보거나, 세상의 것을 집착하지 말고 하늘의 것을 추구하라는 중세적 ‘세속의 멸시’의 책으로 환원시키거나, 한두 가지 주제만 취사선택하여 다루는 것은 다소간 안이한 접근들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도서를 대할 때는, 우리 자신의 선입견이나 편견들에 대해 다시 점검하고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본서에서는 본문 비평이나 해석/비평사 등의 학술적 논의는 뒤로 하고, 책의 메시지를 파악하는 일에 집중하기 위해 저작권 문제, 구조, 메시지 순서로 설명한다.

 

1. 저작권 문제

 저작권의 문제는 심지어 보수진영 내에서도 의견이 갈린다. 대표적으로 영과 델리취 같은 학자들도 전도서를 솔로몬의 저작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참고로 자유주의 학자들은 전도서를 대강 B.C. 300-200년 작품으로 보고, 솔로몬 저작을 단지 신앙고백이라고 치부해버린다. 

 

1) 아처의 견해

 사실 전도서에서 저자를 솔로몬으로 명확하게 특정하는 곳은 없다. 그러나 아처는 전도서의 내적 근거-“비교할 수 없는 그의 지혜”(1:16), “그와 겨룰 수 없는 재물”(2:8), “엄청난 그의 심복들”(2:7), “감각적인 여러 쾌락의 기회들”(2:3), “방대한 건축 공사”(2:4-6) 등-를 들어 책의 저자가 솔로몬이라고 주장한다. 전통적으로 유대인과 그리스도인 학자들이 다 함께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전도서 전체를 썼다고 믿어온 것과 같은 결론이다. 

 후대 저작설을 주장하는 학자들과의 논쟁을 통해 아처의 주장을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언어적 자료를 검토해보면, 다후드는 전도서가 페니키아어와 연관이 있다고 봤다. 형태론, 구문, 어휘 등에 있어서 전도서는 가나안·페니키아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문학적으로도 마찬가지라고 주장했다. 아처는 이런 주장을 배제하지 않고, 페니키아, 아람의 배경을 전도서가 받았음을 인정하는 동시에, 솔로몬 당시의 활발한 외교적 교류이 두 지방으로부터 언어와 문화, 정치, 경제 등 다방면으로 영향을 주고받았을 가능성을 오히려 부각시켰다. 이를 통해 전도서 안에 실재하는 외부적 요소를 인정하면서도 솔로몬의 저작에 대해 긍정할 수 있는 길을 열어두었다. 언어적 자료를 더 검토해보면, 전도서의 히브리어는 어느 시대의 언어라고 특정할 수 없을 정도로 굉장히 독특함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아처는 전도서의 히브리어를 영이나 델리취의 5세기나 혹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2세기가 아니라, 솔로몬의 10세기가 더 가깝게 인식한다. 대표적인 것이 관계대명사 (아쉐르의 줄임꼴)인데 이 단어가 여호수아, 사사기, 애가, 에스겔, 욥기 등에도 나타나기 때문에, 델리취와 영의 주장처럼 반드시 5세기 작품으로 여길 필요가 없다고 일갈했다. 오히려 아처는 델리취와 영이 ‘쉐’의 빈도가 높은 아가서는 그 저작 연대를 10세기로 보면서, 동일한 논리로 전도서를 5세기로 보는 것의 모순도 지적했다.

 

2) 영의 견해      

 영은 전도서의 언어와 어법이 10세기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책의 저자를 솔로몬이 아니라, 포로기 이후에 산 누군가로 본다. 전도서의 언어가 아람어풍을 많이 띈다는 이유로 저술 연대를 대략 말라기 시대로 추정하고 있는 것이다. 5세기의 누군가가 자신의 메시지를 잘 전달할 목적으로 문체적 모범을 위해 솔로몬의 입을 빌린 것으로 보고 있다.  

 나아가 영은 정황적 증거를 들이민다. 

① 1:1 저자는 스스로를 “예루살렘의 왕 다윗의 아들”이라고만 말한다. 솔로몬이라는 이름을 굳이 말하지 않으면서 모호한 제목을 둘 필요가 없다. 그리고 이 책 어디에서도 솔로몬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지 않다. 

② 1:16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 지혜를 많이 얻었다”고 말하는데, 이는 전대 왕들이 많았다는 전제를 둬야 하는 진술임으로 솔로몬(의 전대 왕은 사울, 다윗 두 명뿐임)과 맞지 않다. 

③ 1:12 “나 코헬렛은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었다”고 하는데, 여기 쓰인 과거 시제는 현재는 그가 왕이 아님을 의미한다. 그런데 솔로몬은 자기 생애 마지막까지 왕으로 있었다. 

④ 저자가 직접 자신이 솔로몬이 아니라는 암시를 주는 듯한 구절이 있다. 저자가 자신을 폭군의 표본인 듯 말하거나(4:13), 솔로몬의 평화번영 시대와 맞지 않는 듯한 “압제”(4:1-3), “왜곡된 공의”(5:8), “가난”(7:10, 8:9, 10:6-7) 등이 배경으로 등장하는 점이다.

 

3) 델리취의 견해

 델리취는 전도서의 언어적 측면에 대해서 처음 주의를 집중시킨 사람(영이 델리취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는 전도서에 포로기, 포로기 이후의 책들과 탈굼, 미쉬나 등에서만 찾을 수 있는 단어 96개의 예를 들었다. 특히 명사들의 경우 아람어의 영향을 받은 꼴이 많다고 지적한다. 라멧-알렙 동사가 라멧-헤 동사처럼 취급된 점, 옛 히브리어에 많던 동사의 여러 법들moods이 사라진 점, 이미 동사에 포함된 주어를 굳이 인칭 대명사를 써서 나타내려 한 점, 지시대명사 를 많이 사용한 점 등도 지적하는데, 이는 미쉬나의 언어와 어법을 많이 닮은 것으로 전도서 저작 시기가 포로기 이후라는 결정적 증거라고 주장한다. 

 또한 정황적 증거로 다음과 같은 것을 열거한다. 

① 저자가 솔로몬, 여디디야(삼하 12:25)로 불리지 않고, 에스라-느헤미야 시대에나 이르러 생겨난 것으로 보이는 낯선 이름 코헬렛으로 불리는 점 

② 1:12에서 과거에 왕이었다는 늬앙스를 내비치는 것 

③ 1:1에 “다윗의 아들”이라고만 한 것이 자신의 경험진술을 솔로몬의 고백인양 포장하려는 시도처럼 보이는 점 

④ 전도서가 그리는 시대 배경이 오히려 바사 제국의 지방장관들이 통치하던 어지럽고 암울한 상황과 맞아떨어지는 점 

 이와 같은 이유들을 들어 델리취는 전도서 저자를 익명의 유대 사상가로써 팔레스타인 사람이었을 거라고 추정한다.

 

4) 저작권 문제에 대한 결론

 보수신학자들 상당수도 솔로몬 저작을 부인하는 현실 아래, 솔로몬 저작권을 옹호하는 전통적 입장이 ‘과학적’ 근거 앞에 완전히 패배한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은 이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최근에 이 과학적 증거라고 했던 근거들이 다분히 편견에 기초한 해석일 수 있다는 점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1988년 프레데릭스의 전도서 연구는 폭넓게 지지와 동의를 받지 못한 한계를 갖지만, 적어도 언어연구 등의 과학적 방법 등이 후대저작설의 근거라는 일반적 선입견이 잘못된 편견일 수 있다는 가능성은 열어주었다. 그리고 상술했듯이 아처의 주장한바 전도서의 히브리어 원어가 히브리 역사에서 알려진 어떤 시대와도 일치하지 않을 만큼 독특하다는 것은 꽤나 설득력이 높은 내용이다. 

 정리하면, 솔로몬의 저작을 부정하는 경향은 다분히 근대주의 학문 분위기의 영향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이 입장을 확고부동의 절대 진리로 여겨서는 안 된다. 물론 전도서 본문에 솔로몬 저작의 직접적인 마크가 없기 때문에 이 역시 절대 진리로 여겨서는 안 된다. 

 다만, 본서는 양측의 가능성이 다 열려 있는 상태에서 시대의 편향에 따른 결론은 일단 유보하고, 회당과 교회가 오랫동안 견지해온 전통을 소중히 존중하는 것을 권장한다. 그리고 박윤선 박사 역시 아처 교수와 비슷한 논지를 펴고 있음도 주지의 사실이라 할 수 있겠다. 

 

2. 전도서의 구조

 전도서의 구조는 어느 두 학자도 서로 동의하는 예가 없다고 할 정도로 아주 난해한 분야이다. 일단 대강의 구도는 아래와 같다. 물론 우리는 전도서 자체가 한 사람의 저작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분석을 할 것이다.  

1:1 제목

1:2-11 서론부: 주제의 일부 제시

1:12-12:8 본체부: 자전적 묵상, 관찰, 훈계

12:9-14 매듭부: 본체부를 의미 있게 하는 결론

 그렇다면, 전도서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본체부를 어떻게 분석해야 할 것인가? 많은 주장들이 있지만, 핵심 구절의 반복이라는 객관적 근거에 의존한 라이트의 분석이 주목할 만하다.

1. 표제와 서언(1:1-11) // 결언(12:9-14)

2. 핵심 구절에 기초하여 책을 두 개의 주요부로 나눔

a. 1:12-6:9 6개의 단락: 각 부분은 헛되다” 그리고/또는 “바람을 잡는다로 끝남

    2개의 서론(1:12-15, 16-18) 다음에 아래와 같이 작성되어 있음

2:1-11

2:12-17

2:18-26

3:1-4:6

4:7-16

4:17-6:9

 

b. 6:10-11:6 2개의 부분으로 나누어짐

6:10-8:17 서론, 4개의 단락: 파악할 수 없다/누가 파악할 수 있으랴? 

6:10-12 

7:1-14

7:15-24

7:25-29

8:1-17 8:17은 “파악할 수 없다”가 세 번 반복됨

 

9:1-11:6 4개의 단락: 알지 못한다는 구로 시작됨

9:1-12

9:13-10:15

10:16-11:2

11:3-6 11:5-6은 “알지 못한다”가 세 번 반복됨 

 

3. 최종적으로 젊음과 노년에 대한 시(11:7-12:8)가 나온 다음, 결언(12:9-14)이 이어짐

 

 그러나 이 분석도 완벽한 것은 아니다. 

(1) 일정한 구절의 반복이라는 “형태” 중심의 구조 분석은 한편으로는 인위적 분석이라는 인상도 피할 수 없다. 즉 하나의 단위로 나뉜 단락 속에 여러 주제들이 들어있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4:17-6:9의 경우, 말, 정부, 재물에 대한 교훈의 세 가지가 주제가 한 단락 안에서 아무런 연관성 없이 섞여 있다. 

(2) 나누어진 단락 안에서 필연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이질적인 내용이 이어져 나타나 단락의 의도를 흐리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7:15-24인데, 15-18절은 정의의 부재에 대한 냉소와 순응을 말하는 반면, 19-22절은 두 가지 이상의 실제적인 권면이 제시되고 있다. 논리적으로 반드시 이어진다는 보장이 없고, 형태도 전자는 산문, 후자는 시로 생각된다. 

(3) 저자가 원래 의도한 논리적 연결을 오히려 파괴할 가능성도 있다. 예를 들면, 7:13-14와 7:15-18은 이어진 하나의 문단으로 볼 때,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순응하라(전도서 전체의 메시지)는 메시지가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3. 전도서의 메시지 

 통상 “헛되다”(vanity)로 번역되는 헤벨은 구약 전체에 59회 나오는데, 그 중 38회가 전도서에 나온다. 그렇기에 이 헤벨을 전도서의 핵심어로 볼 수 있겠다. 이는 책의 봉투구조를 이루는 1:2과 12:8이 헛되고 헛되다”(vanity of vanities; 하벨 하발림)로 채워져 책 전체의 모토 역할을 하는 것으로 봐도 그렇다.  

 헤벨은 원래 “숨”, “수증기”, “안개”, “연기”이다. 여기서부터 “헛된”, “덧없는” 등의 의미가 파생(무익한, 무의미한, 목적이 없는, 가치가 없는 등)되었다. 그런데 최근에 이 헤벨의 의미에 대해 부조리, 불합리(absurdity)로 번역할 것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나왔다. 그로 인해 크렌쇼는 헤벨에 부조리의 의미가 있음을 충분히 인정하면서 전통적인 의미와 합하여 해석하는데, 그 결과 헤벨을 “무익하며 전적으로 부조리한” 어떤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한다. 본서 필자도 이 의견에 동의하며 all or nothing이 아니라, 문맥에 맞도록 적절히 선택하여 번역할 것을 주장한다. 다만, 통일성을 위해 번역은 원어에 가깝다고 여기는 하나의 번역어(vanity)를 선택하고, 그 구체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주해를 통해 해명하는 합리적인 방안을 제시한다. 정확하게 구분 지을 수는 없지만 그 대강은 아래와 같다. 

(1) 헤벨이 “vanity”라는 의미로 쓰인 경우

    1:14; 2:1, 11, 19(A); 4:16(A); 5:7, 10; 6:4, 11, 12; 7:6; 9:9

(2) 헤벨이 “absurdity”라는 의미로 쓰인 경우

    2:15, 17: 19(V), 21, 23, 26; 3:19; 4:4, 7, 8 ,16(V); 6:2, 9; 7:15; 8:10, 14; 11:8, 10

 이처럼 전도서 저자는 헤벨을 쓰는 상황에서 뿐 아니라 쓰지 않는 상황에서도 인생(세계)에 대해 “헛되고 부조리하다”는 평가를 내리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단지 세상을 향한 부정적인 해석에만 그치고 있지 않다. 저자는 헤벨로 가득한 이 땅 위에서의 삶의 현상을 독특하게 평가하고 난 후, 쉬이 ‘납득할 수 없는’ 세계, 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쉬이 납득할 수 없는 하나님 자신을 ‘받아들일’ 지혜를 가지라고 권하고 있다. 이를 메시지화해보자.

 

-전도서의 메시지-

성격과 목표

핵심 개념

메시지

회의주의(skepticism)

헛됨(vanity)

“헛되다”

불평(complaint)

부조리함(absurdity)

“부조리(불합리)하다”

상담(counsel)

순응(resignation)

“받아들이라”

 

 

 전도서의 저자는 하나님의 작정을 인간의 힘으로 저항하거나 변개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아주 잘 알았다. 그래서 불순종에서 오는 치명적인 상처로부터 영혼을 보호하고 평온을 확보하기 위해 “싸움을 포기하라, 물러서라, 그리고 받아들이라!”를 인생의 지혜로 제시한다. 그리고 이 지혜를 가르치기 위해 아래 세 가지 방식을 사용하여 전달하고 있다.

 

(1) 전도서의 여러 구절이 직접적으로 이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7:13) 여기서 “굽었다”는 것은 고통, 역경, 인간이 동의하기 어려운 환경이나 상황 등을 말할 텐데 이런 것을 고치거나 자기 마음에 맞게 변경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말한다. 이는 되어지는 일들에 순응할 것을 권하는 가르침이다. 

  - “무릇 된 것이 멀고 깊고 깊도다 누가 능히 통달하랴”(7:24) 여기서는 하나님의 초월과 그의 주권 앞에 인간의 한계를 통감하는 탄식이 보인다. 이처럼 전도서의 하나님은 극단적으로 주권적인 하나님이시다. 

 

(2) 즐거움 단락’ 사용: 납득되지 않고 해소되지 않는 고민으로 괴로워하다 돌연 태도를 바꿔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서 즐거움을 누리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 권면

  • 전도자는 인간의 무력함에 대해 자신의 절망이 극에 달할 때 이 즐거움 권면을 하곤 한다. 인생의 매우 깊은 문제들에 대해서는 사실상 답이 없다. 다만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삶을 주셨다는 것, 그 자체가 전부다. 불필요한 질문을 하느라 에너지 소비하지 말고, 우리게 맡겨진 하루하루를 그저 충실히 살아내는 것이 삶의 지혜다. 

  - 2:24, 3:12-13, 3:22, 5:18-20, 8:15, 9:7-10

 

(3) 결언을 통한 방식

  -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12:13) 저자는 1:2-12:8까지 자신의 고민(회의, 불평)을 늘어놓다가 12:9-14에서 긍정적 충고로 마치는데, 이는 두 작품이 합쳐졌거나 편집의 가능성이 아니라, 한 저자가 전도서라는 전체 책에서 그의 의도한 바를 마지막 반전에 담아뒀다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즉 고민은 고민대로 정직하게 말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주신 세계/환경에 대해서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단순하고 직접적으로 충고하고 있는 것이다. 

 

4. 맺는 말

 전도서의 메시지 “하나님의 견지에서 하나님을 받아들이라”(Accept God on God’s terms)

 전도서의 목적: 하나님의 주권을 철저히 신뢰하는, 깊은 신앙을 독려하는 책

 초월적 주권자이신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에게 숨겨진/감춰진 존재이셨고, 그가 하시는 일은 인간의 유한한 능력으로 다 파악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가리워진 하나님의 의지를 파악하려고 엄한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보다 허용된 하나님의 뜻에 집중하여 살아야만 할 줄로 안다. 피조물인 인간은 그저 자신의 고집이나 주장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을 그대로 수용해야 할 뿐이다. 

 인간에게는 두 가지 종류의 씨름하며 살아갈 문제가 있다. 하나는 기도해서 해결할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그저 담담히 받아들여야 할 문제이다. 예수님께서도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라고 말씀 하셨으니, 우리는 그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임을 믿고 자유롭고 확신에 찬 기도를 통해 삶을 개척해나갈 필요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곤경을 처리할 능력이 충분함에도 때로는 어떤 어려움에 일정 기간 우리를 방치하실 때가 있는데, 그 때는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서 삶의 되어지는 일들을 그저 받아들이는 것이 신자의 지혜임을 기억하라.

John Stek 교수의 전도서 요약

1. 하나님의 작정하심에 의해 결정된 인간의 상태를 받아들이라.

2. 네가 할 수 있는 대로 충분히 인생을 즐겨라.

3. 비현실적인 목표를 가지고 너 자신을 들들 볶지 마라(분수를 알라).

4. 모든 일에 분변 있게(신중하게) 행동하라.

5. 하나님과 왕 앞에서 신중하게(용의주도하게) 처신하라.

6. 젊은 날부터 하나님을 기억하며, 그를 두려워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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