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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간사훈련원에서 첫 설교실습 (110118)

白부장 2016. 7. 6. 01:41

그러나, 너는! (디모데후서 3:14~17)




여러분, 혹시 “미디어의 실체”라는 유투브의 동영상 보신 적 있으십니까? 2시간 정도의 내용인데, 그 내용을 대강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전제는 일단 사람은 영과 육으로 되어 있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듣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 그 이면에 있는 영적인 실체들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영혼에 영향을 미친다는 거죠. 동영상에서 제일 기억에 남았던 내용 중에 하나는 ‘소녀시대’의 노래가 백워드매스킹으로 만들어졌다는 내용이예요. 노래를 거꾸로 틀어보면 그 안에 입에 담기 어려울 정도의 음란메시지들이 들어있고 그것을 일부러 그렇게 만들어 놓았다는 거죠. 마치 광고의 기법 중에 하나인, 서브리미널 효과, 즉 무의식광고기법, 잠재의식 광고법과도 비슷한 내용인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영화를 제작할 때 그 영화 필름 중간중간 프레임에 코카콜라나 팝콘의 이미지를 한 컷씩 삽입해 놓으면, 그것이 실제 영화로 상영될 때는 우리의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수준이지만, 우리의 무의식 중에 그 이미지들이 반영이 되어서 실제 콜라와 팝콘의 구매량이 늘어난다는 거죠. 그것처럼, 백워드매스킹도 실제 노래를 들을 때는 별 문제 없는 가사들이지만, 우리의 무의식, 영혼은 그 안에 들어있는 음란메시지들에 반응해서 그 노래를 더 듣고 싶게 되고, 영향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동영상을 본 후, 그 내용이 조금은 충격적이이서 “그래, 미디어를 신중하게 대하자, 가요는 왠만하면 듣지 말자!” 다짐했습니다. 혹시 아직 안 보신 분 있다면 집에 돌아가셔서 꼭 보시기 바랍니다. 다 보신 후에는 유주환 간사에게 꼭 보고 왔다고 확인시켜 주세요.

제가 왜 갑자기 뜬금없이 이런 이야기를 꺼냈을까요? “미디어의 실체”, 그리고 영과 육으로 되어 있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도 의식하고 살아야 하는 우리의 실존을 이야기 하고 싶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제가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그 동영상을 본 후의 저의 반응입니다. 동영상을 본 후와 얼마간의 시간동안은 그 다짐들이 잘 유지되었지만, 그 다짐들, 실천들은 오래가지 못했어요. 영적으로 도움 되지 않아! 신앙의 결단으로 이제 가요는 듣지 않겠어! 다짐했지만, 얼마 전 인터넷 기사로 소녀시대 컴백 등의 기사가 나올 때는 괜히 설레고 기다려지더라고요. 또 기분이 울적한 날에는 전에 하던 것처럼 내 기분을 대변해줄 만한 우울한 가사의 가요들을 찾아 듣기도 하고요.

그런데 비단 이게 저만의 문제는 아니죠? 사실 우리에게는 이러한 경험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신앙의 결단들이 삶의 문제와 현실 속에서 꺽이는 문제들 말이죠. 수양회 신앙도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많은 대학생 청년들이 여름과 겨울에 있는 수양회에서 얻은 영적인 자양분을 가지고 한학기를 버티고 살죠. 근데 사실은 수양회를 다녀와서 근본적인 삶의 변화들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지는 않고, 또 다시 삶의 현실의 문제에 부딪히면 수양회에서 받은 은혜들과 결단들은 뒤로 하고 이전과 같은 선택과 반복되는 삶의 무기력함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자신의 결단을 삶으로 실천할 수 있는 의지력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였지만 아직은 현실이라는 삶의 터전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어쩌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고민, 부대낌, 현상들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런데 사실 “왜?”라는 질문도 참 중요하겠지만, 그에 대한 대답을 알고자 깊이 들어가는 것보다, “우리는 원래 그런 존재들이다.”라고 인정하고, 그럼 “어떻게 안 그럴 수 있을까?”를 배우고, 실천하는 일이 더 현명한 일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제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를 자꾸 넘어뜨리는 시대와 환경 가운데서 신앙의 결단을 유지하고 사는 법”
우리가 읽은 디모데후서 3장의 말씀은 이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디모데후서는 어떤 내용이죠? 간단하게는 바울이 이 땅에서의 삶을 거의 마무리하는 시점에 동역자이자 후계자, 영적인 아들과 같은 디모데에게 쓴 편지입니다. 디모데는 당시에 바울이 개척하였던 에베소 교회에 남겨져서 사역을 하고 있었는데 그 사역들이 조금은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교회 외부에서는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핍박이 있었고, 내부에서는 거짓 가르침들이 널리 퍼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랑하는 디모데에게 성경과 그 안에서 발견되는 진리의 가르침에 집중하라고 권면하는 것이 본 서의 내용입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당시의 상황들이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이 3장 1절에서 9절까지 나오는데요, 1절에서부터 보면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교만하며, 5절에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또 6절에서부터는 남의 집에 들어가서 적극적으로 거짓된 가르침으로 믿음이 약한 자들을 유혹하는 자들의 이야기도 나옵니다.
1절부터 4절까지 언급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등등. 여기에서 완전히 자유로우신 분 있으십니까? 우리 역시 그런 모습이죠. 죠이어로 살며, 예수님을 첫째로 두고 이웃을 둘째로 두고 나 자신을 셋째로 둘 때 그 삶에 참 기쁨이 있다고 죠이스피릿이 좋아 학생리더로 섬기고 그것도 모자라서 간사까지 되었지만, 우리의 삶에 있어 중요한 선택의 순간이 다가올 때는 다시 심하게 갈등하며, 그 순서를 헛갈려할 때가 있죠. J, O, Y가 되어야할 것이, Y, J, O가 되기도 하고 어쩔 때는 O, Y, J가 되기도 하고.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여기서 “부인하다”의 원어적 의미를 생각해보면, “포기하다”로 바꿔서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기도를 예로 들어볼까요?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해야겠다는 필요들을 알고 다짐을 하고 그래, 이번 학기 아침기도회를 결단해보자, 혹은, 개인적으로 얼마만큼의 시간을 충분히 확보해서 개인 기도의 시간을 가져야겠다 다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초반에는 아무 문제없이 진행이 됩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들이 있습니다. 매일 결단한 대로 그렇게 살지만 뚜렷한 효과를 보지 못하는 겁니다. 기도를 하고 있지만 여전히 내 삶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 것 같고, 여전히 성적은 안 오르고, 공동체의 그녀석이 여전히 꼴보기 싫고. 그렇게 되면 조금씩 관성에 젖은 기도를 하게 됩니다. 다만, 하나님의 타이밍과 나의 타이밍이 다른 것이므로 기도한 것은 이미 하나님이 들으신 줄 알고 믿고 그 때를 기다려야함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포기하게 되죠. 그래, 기도해봤자, 그 시간을 조금 지혜롭게 사용해서 공부를 조금 더 하자, 차라리 좀 쉬자, 이렇게 타협하게 됩니다. 아니면, 일종의 책임감에 의해서, 그래 내가 그래도 크리스쳔인데 이러면 안되지. 반성해가면서 억지로 억지로 기도를 합니다. 이러한 시간이 길어지면, 습관이 되면 그 관성에 젖은 기도마저도 안하는 사태까지도 발생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위한 기도, 혹은 경건을 위한 경건을 할 때가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경건생활을 하는 이유는 경건생활을 통해 하나님께 얻는 능력을 가지고 경건한 삶을 살아가는 것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눈에 보이는 말씀읽기 얼마, 기도의 시간 얼마, 기도회 참석 얼마 등에 집중하며 살고 있을 때가 많이 있죠. 묵상을 해보면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의 모습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6절부터 9절까지는 적극적으로 진리를 대적하는 자들을 언급합니다. 이단의 무리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최근에 제가 섬기는 모교회가 신천지로 인해 큰 어려움을 겪은 일이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재빨리 상황을 판단하시고 출교조치를 하시면서 잘 수습이 되었지만, 또다시 침투하려고 애쓰는 형국입니다. 목사님 말씀으로는 새벽예배를 마치고 댁으로 돌아가시려고 일어나시는데 강대상 위에 신천지 전도지가 떡 하니 있다고 하더라구요. 지금의 상황은 그런 상황입니다. 이단들의 세력이 강성해져가고 더 깊이 교회에까지 침투하려고 하죠.

이러한 상황 가운데 사도바울은 14절에서처럼 “그러나 너는”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이토록 말세의 고통하는 때에 이르렀다, 세상 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거짓 가르침으로 인한 어려움이 많다. 그렇지만, “그러나 너는 그렇게 살지 말고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라고 강조를 합니다. 이 말이 정확히 어떤 의미일가요? ‘거하라’라는 말은, 영어로는 ‘continue in’이라고 되어 있고, 원어적 의미로는 ‘머무르다’의 의미가 있습니다. 같은 단어로 사용되고 있는 구절이 요한복음 15장 4절의 말씀입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어떤 이미지인지 아시겠죠? 우리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우리가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할 수 있을까요? 14절에서 17절을 돌아보면 우리가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할 수 있는 이유와 방법이 여기에 있습니다. 먼저 14절 하반절을 잘 볼까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그렇습니다. 우리가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할 수 있는 첫 번째 이유는 우리가 누구에게 배웠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10절에서 13절을 보면 바울은 자신의 가르침과 삶과 사역, 받은 핍박과 고난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을 변호합니다. 12절의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고 말씀하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사는 나 바울이 너 디모데를 가르쳤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나를 기억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는 비결은 좋은 신앙의 모범을 만나는데 있습니다. 아, 누구처럼 신앙생활하고 싶다, 어떤 목사님처럼, 간사님처럼, 선배처럼, 혹은 성경 속의 다윗처럼, 모세처럼, 누구처럼 하나님 사랑하며 하나님께 쓰임 받고 싶다, 이런 도전이 우리의 하나님을 향한 열심에 불을 붙이죠.

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제가 간사가 된 어쩌면 결정적인 계기는 2학년 때 연세죠이 담당 간사님과의 만남 때문이었을 겁니다. 실제적으로 함께 했던 시간은 1년 반 정도이지만, 제 인생 가운데 큰 영향을 끼쳐주셨죠. 함께 중국 땅을 밟았고, 캠퍼스에서 살면서 간사님께서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사시는지, 내가 삶의 고민을 갖고 나갔을 때 어떤 방식으로 말씀해주시고 이끌어주시는지를 보고 배우면서 간사님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고, 결국에 7,8년이 지나 저도 같은 길을 걷고 있습니다.

우리가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누구에게 배우는지, 그 누구에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할 수 있는 방법이 파생됩니다. 그것은 바로 공동체입니다. 공동체가 성숙해갈수록 우리는 우리 공동체에 속한 각 죠이어들을 보며 배울 수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서로가 서로에게 삶의 모범이 되어주면서 서로의 신앙을 지켜주며 성장시켜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도전하기는, 공동체에 깊이 들어와 생활하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도전이 되는 삶을 살면서,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십시오.

그리고 두 번째로는 15절에서 17절의 고백입니다. 바로 성경입니다. 우리가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할 수 있는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경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능히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가 있고, 우리를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 나아가 성경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합니다. 물론 성경에 대해 우리가 위와 같은 내용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어렸을 때부터 주일학교 생활을 해온 지체들이라면 이 요절을 아직도 암송할 수 있을 정도로 교회에서 많이 강조한 내용이니까요. 그러나 우리의 실상은 이 말씀과 전혀 동떨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지난 여름 수양회 때 죠이어들을 대상으로 설문해본 결과를 혹시 알고 계신지요? 성경을 정기적으로 읽느냐는 질문에 대한 긍정의 대답이 51.75%입니다. 많은 죠이어들이 따로 성경을 읽지 않는다는 것이죠. 더군다나 그들 중 대부분은 큐티할 때 성경을 잠깐 읽는 정도로, 성경을 따로 읽고 배우는 일에 대해 굉장히 인색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할 수 있는 방법은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성경에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매일 가지고 다니는 성경 말씀이죠. 그러면 혹시 그런 생각이 들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단순히 성경을 읽는 것만으로, 그리고 배우고 공부하는 것만으로 가능한 것인가? 그것은 우리가 충분히 하지 않았나? 또 다른 방법론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그렇지만 우리가 이 성경의 저자가 누구인지 알 때 우리는 이 문제들에 대하여 단호하게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16절의 말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성경의 저자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감동이 당대 하나님의 말씀을 따로 살고자 순종하였던 이들을 통해 성경을 쓰게 하셨고, 그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묵상하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감동으로 다시 말씀하여 주시고 우리의 삶을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할 수 있는 방법은 성경을 통해 우리를 사랑하시고 악으로부터 보호하길 원하시는 하나님께 계속해서 우리를 오픈해놓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려면, 우리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를 가르친 사람이 누구인지 아는 것, 즉 우리를 가르친 사람에 대한 신뢰이며, 더불어 하나님의 감동으로 우리에게 주신 성경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할 수 있는 방법은, 공동체 안에 깊이 들어와 공동체 안에서 서로 배우고 서로에게 신앙의 모범이 되는 일이고, 개인적으로 매일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기본적이지만, 절대적인 이 말씀을 기억하고,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 수 있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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